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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경주] 경주 탈해왕릉(慶州 脫解王陵) / 경주표암 (慶州瓢巖)

경주 탈해왕릉 (2023.08.03.목)

경주의 여름꽃 명소들 방문 전에 찾았던 경주 첫 일정으로 돌아가 봅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시내의 어느 고깃집을 점찍고 갔었는데,

점심 예약이 끝났다는군요.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그냥 적당한 한식이나 먹자며 발길을 돌려

경희정이라는 곳에서 돌솥밥정식으로 속이 편하게 먹습니다.

식사 후 탈해왕릉에 잠시 들러 봅니다.

 

 

경주 탈해왕릉(慶州 脫解王陵)

신라 제 4대 왕 탈해이사금(신라 최초 석씨 왕)의 능입니다.

탈해왕릉 입구의 무료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 봅니다.

탈해왕릉과 주변 솔숲의 모습입니다.

명품 솔숲이로군요.

날씨만 좋으면 산책하며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인데,

불볕더위 때문에 잠시만 돌아보네요.

 

 

현지 안내판 설명을 옮겨 봅니다.

 

이곳은 신라 제4대 탈해왕(57~80 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왕은 석씨(昔氏)로 이름은 ‘탈해’이고,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이다.

탈해왕은 62세 때 유리왕(琉璃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다파나국*의 왕과 왕비 사이에서 알로 태어나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려졌다가

신라로 떠 내려와 성장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왕이 세상을 뜨자 성의 북쪽인 양정(壤井) 언덕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경주 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봉분을 장식한 석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1974년에 내부 구조가 굴식돌방무덤**인 것을 확인하였다.

능의 주변에는 신라 화백회의의 근원이 되는 장소인 표암***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25년에 건립한 표암재(瓢巖齋)가 있다.

또한 탈해왕의 제향****을 드리기 위하여

19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온 숭신전(崇信殿)도 있다.

 

*다파나국(多婆那國): 신라 건국기에 있었던 나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시신을 넣고,

한쪽 벽 또는 그 벽의 일부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흙으로 덮은 무덤

 

***표암(瓢巖): 표암이란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하는데,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 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9년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으며,

그후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었다.

이와 같이 표암은 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화백이라는 민주 정치제도의 발상지인 성스러운 곳이다.

 

****제향(祭享): 각종의 제사 의식(祭祀儀式)을 말함.

 

 

경주 탈해왕릉 (2023.08.03.목)

문화재청 설명도 옮겨 봅니다.

 

신라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 동북 1,000리 지점에 다파나국의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김해)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았고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닿았는데 노파가 거두어 키웠다.

궤짝이 떠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씨 왕이 되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 제4대 탈해왕(탈해이사금. 57~80년 재위)의 능을 본 후

바로 옆의 표암으로 가 봅니다.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

소금강산(해발 176.7m)의 정상에서 남으로 표암과 탈해왕릉이 위치하는 곳까지

남북 약 1,120m, 동서 최대 폭은 724m가 되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여러 문화재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표암, 탈해왕릉, 숭신전, 백률사(대웅전, 선각마애탑),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동천동(마애삼존불좌상, 고분군) 등이 있습니다.

표암과 표암재 일원

 

 

<삼국유사>에 의하면 표암봉은 이알평의 탄강지.

 

현지 안내판

 

문화재청 자료도 옮겨 봅니다.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오늘날 경주의 중심지에는

명활산(동, 245m), 선도산(서, 381m), 남산(남, 468m), 소금강산(북, 176.7m)이

사방으로 에워싸 경주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주 시내 북쪽이자 북편일대는 행정구역상 용강동, 황성동, 동천동이 위치하고,

그 동쪽으로는 동산(133.3m)에서부터 소금강산, 무지기산(148.6m)에 이르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지가 자리하고 있다.

금강산 표암봉 일원은 소금강산(해발 176.7m)의 정상에서

남으로 표암(기념물)과 탈해왕릉(사적)이 위치하는 곳까지

남북 약 1,120m이고, 동서의 최대 폭은 724m가 되는 지역이다.

금강산 표암봉 일원에는 남쪽으로

표암, 탈해왕릉 등 신라 초기의 역사유적이 있고,

그 북쪽인 금강산 정상부 부근과 서편 구릉에는

백률사, 굴불사지 등의 불교유적이 남아 있으며,

정상부와 표암봉 사이의 산지일대에는

6~7세기 신라 횡혈식 석실분으로 이뤄진 동천동 고분군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강산 표암봉 일원에는 국가지정문화재 2건과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4건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과 경주 탈해왕릉(사적)이 있고,

도지정문화재는 경주 표암(기념물), 경주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유형문화재),

백률사 대웅전(문화재자료), 숭신전(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대상지 내에는 비지정문화재로 백률사 선각마애탑과

최근 발굴이 추진되어 실체가 일부 확인된 동천동고분군(6~7세기 횡혈식 석실분) 등이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된 백률사 금동여래입상(국보)과 이차돈 순교비는

원래 금강산에서 옮겨진 것으로 신라 불교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이다.

 

2022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표암재와 뒤편의 표암

표암은 경주이씨의 근원지, 신라 건국의 산실, 화백이라는 민주정치제도의 발상지인 곳.

 

 

표암재 앞에 있는 표암 설명 안내판이고. 그 내용을 아래에 옮겨 보네요.

 

 

경주 표암(瓢巖)

표암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기원전 69년,

진촌 6촌장들이 자제들을 데리고 모여서 신라 건국을 논의한 알천언덕이며,

*화백(和白)이라는 민주정치제도의 발상지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국가대사를 논의하는 4곳의 신령스러운 장소(**사령지) 중 금강산의 회의장소이기도 하다.

 

진한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알평(謁平)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 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표암은 '밝은 바위' 혹은 '박바위'라는 뜻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으므로 '박바위'라 불렀다고도 한다.

 

2011년 표암의 암벽면에서 암각화와 2행 13자의 음각 명문이 발견되었다.

암각화는 인물과 삼층탑, 당간지주등이 그려져 있어 사찰의 모습이다.

명문의 내용은 '천보2년(天寶二年) 제35대 만월(滿月)부인 간자상세야(干子上世也)' 로 확인된다.

천보 2년은 제35대 경덕왕2년743에 해당되는데,

이는 곧 겅덕왕비 만월부인이 표암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신성성에 기대어 사찰도를 그려놓고

대를 이을 아들 얻기를 부처님께 빌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화백(和白): 화백회의. 신라시대에 부족 대표들이 모여 중요 사항을 합의하여 처리하던

씨족사회 전통을 계승한 회의로 만장일치제가 특징임.

 

** 사령지(四靈地): 동쪽 청송산, 서쪽 피전, 남쪽 우지산, 북쪽 금강산

 

 

앞쪽으로 악강묘와 표암재, 뒤 바위군이 표암, 산 위에 표암 유허비.

탈해왕릉 왼쪽 표암재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을 오르면

표암 유허비와 광림대를 만날 수 있는데,

더위에 발걸음 옮기기 힘들어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요.

 

 

이알평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 표암재 

 

 

앞쪽으로 악강묘와 표암재, 뒤로 표암, 보이는 산 위에 표암 유허비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을 모시는 사당인 악강묘

 

 

보이는 비는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 경모비이고

왼쪽 뒤로 관리사가 있습니다.

 

 

악강묘와 표암재

문이 닫혀 있어 외관만 주욱 바라봅니다.

 

 

배롱나무 사이로~

오른쪽 끝으로 탈해왕릉이 보이네요.

배롱나무꽃 한 그루만 보여도 반갑습니다.

여름날의 행운꽃입니다.

표암에서 다시 탈해왕릉 앞을 지나 숭신전으로 갑니다.

 

 

 

 

숭신전(崇信殿)

숭신전은 신라 최초의 석씨 왕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입니다. 

처음에는 월성 안에 지어졌으나 1980년에 이곳으로 옮겼네요.

숭신전 홍살문, 안쪽으로 영녕문, 영녕문 오른쪽으로 모우각.

 

 

현지 안내 설명이고요.

아래는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광무 2년(1898)에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이때부터 ‘숭신전’이라고 불렀다.

처음 지을 때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봄·가을과 춘분·추분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라 3대 왕의 성 가운데 최초의 석씨 왕인 탈해왕(57∼80)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한다.

왜국 동북쪽 멀리 떨어져 있는 타파나국 왕비가 잉태한지 7년만에 커다란 알 하나를 낳았다. 그

런데 알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궤짝에 넣어 바다로 띄어 보냈고 이 궤짝이 신라 땅에 가서 닿았다.

한 노인이 궤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키웠는데,

건질 때 까치들이 울며 따라 왔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어내고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

이름은 궤를 풀고 나와 탈해라 지었다고 한다.

숭신전은 본전 3칸·전사청 2칸·상의재 4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신라 석씨 8왕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석씨 왕이 8명, 173년을 통치했네요.

신라는 박씨 왕 10명, 석씨 왕 8명, 김씨 왕 38명이

약 991년(기원전 57년~서기 935년)간 통치했지요.

 

 

영녕문(永寧門)과 모우각(慕虞閣)

방문 당시에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서 밖에서 휘이 돌아봅니다.

 

 

영녕문(永寧門)과 모우각(慕虞閣)

모우각에는 신라석탈해왕비명(新羅昔脫解王碑銘) 비석이 있습니다.

 

 

영녕문 안쪽으로 상인재상의재가 마주보고 있고...

 

 

상인재상의재를 지나 경엄문을 들어서면 가장 안쪽에 숭신전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 밖에서만 바라봅니다.

 

오랜만에 탈해왕릉 일원을 돌아보았네요.

주변은 언제 보아도 좋은 솔숲입니다.

탈해왕릉 주차장에서 숭신전-탈해왕릉-표암 순으로 돌아보아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너무 더워서 소금강산 산행은 못 했지만

산 너머 백률사, 굴불사지로 이어지는 탐방 기회가 오기를 바래보네요.

 

(방문일: 2023.08.03.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