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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봉화] 봉화 기행 2 - 봉화유기장,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계서당(이몽룡 생가)


[경북 봉화] 봉화 기행 2 - 봉화유기장,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계서당(이몽룡 생가)


<봉화기행 여정>

<봉화읍> 닭실마을(청암정, 충재박물관)-후토스 촬영지

-석천계곡(석천정사)-삼계서원-유기마을

<물야면>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계서당(이몽룡 생가)-축서사-오전약수

<춘양면> 백두대간수목원 주변-각화사-(동궁식당-석식)-(춘양-1박)

-(강남회관-조식)-춘양시장-한수정-만산고택-권진사댁-서동리 삼층석탑

<소천면>분천 산타마을


이번 여행 중 꼭 보려고 마음먹었던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




2015.12.25(금)


권벌 관련 유적지들을 돌아본 후 북지리로 향하였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못 미처

삼계서원에서 5분 안쪽, 읍내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봉화 유기마을(삼계리=신흥리)이 있다.

그곳의 봉화유기와 내성유기 두 기업은

경북 향토기업으로 선정된 기업들이다.

봉화 유기는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전국의 장인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줄 정도로 대단했었는데

생활양식의 변화로 쇠퇴했다고 한다.



봉화유기장 (奉化鍮器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신라시대에 이미 유전(鍮典)이란 것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매우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유기는 대표적인 구리합금 금속으로 각 성분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구리와 주석을 7: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방짜유기라 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동유기라 하는데

두 종류는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난다.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유기라 하며 흰 빛을 띤다.

제작기법에 따라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

쇳물을 형태에 부어 만드는 주물,

그리고 이 두가지를 함께 사용하는 반방짜 등이 있다.

봉화는 지리적으로 숯 생산이 쉽고

수자원이 풍부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는 대체로 19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1900년대 전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해방 후 생활양식이 바뀌어

새로운 합금제품(스테인레스)과 플라스틱제품의 보급으로 점차 쇠퇴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봉화유기는 정치적, 경제적 시대 변화를 거치면서

현재는 고해룡 외 1명이 봉화유기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  

    봉화 유기장 (奉化 鍮器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2-10호

    봉화에서 놋쇠를 다루어 각종 그릇을 만드는

  • 무형문화재인 유기장에는

    고해룡(高海龍)과 김선익(金善益)이 있다.

    고해룡은 3대째 가업을 이어 가고 있고

    김선익씨는 4대에 걸쳐 이 일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긴 세월을 지켜온 봉화 유기~

앞으로도 소중한 우리 것이 잘 이어지기를......


< 봉화 유기마을 >

경북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286

* 경북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257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유기마을을 지나 915번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갔을까

어느새 북지리에 다다랐다.

길가에 붙은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표시가 반갑다.



채식류를 좋아해서 배추나 무 시래기를 버리는 법이 없는 우리로서는

입구의 밭에 널부러진 배추들을 보니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깊은 산골이지만 국보 대접을 위한 배려는 넓은 주차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진 오른쪽으로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산밑으로 건물들이 보이는데,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가장 왼쪽에 보이는 건물 안쪽에 있다.



봉화에 있는 유일한 국보 문화재이다.

훼손을 덜기 위함인지 덧집을 만들어 놓았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201호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양감이 풍부한 얼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에서 자비로움이 번져나온다.

살아있는 듯~ 조각의 자연스러움에 감탄이 나온다.



가운데 큰 좌상을 중심으로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다.




시멘트를 덧바른 느낌이 나는...

그러나 어느 곳의 불상보다 장중한 멋이 느껴지는 모습...



감실을 파고 마애불을 새겼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함을 보인다.

그러나 군데군데 인위적으로 깎아낸 듯한 모습...



누군가에 의해 훼손된 손은 따로 놓여져 있어 애처롭기만 한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마애불로서는 보기 드문 입체감을 보이는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보호각도 돌아본다.




이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마침 전번이 붙어 있어서 연락을 해 볼 생각을 하며......



연락을 해 볼까 싶어서 돌아나오는데,

어느 보살님이 담요에 개를 한 마리 싸서 오셨다.

이유인즉 곧 운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링거를 맞고 버텼으나 이제 명이 다해

부처님 앞에 눞히고 기도를 할 거란다.

"**야, 스님이 기도해 줄게.

**야, 들리지?"

개를 사람처럼 대하는 그분의 기도가 애절했다.


차마 그 모습을 가까이서 찍지는 못하고

멀찍어서 한 장 담았다.

햇살이 강하게 비치는 어느 겨울날,

명을 다한 개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을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마음이 숙연하여져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돌아서 나오고 말았다.

그냥 멀리서 사진만 찍고

잠시 대웅전 뒷편의 마애불 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사실 이곳에 있던 원 지림사는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경주로 돌아오던 의상이 묵은 절집이다.

조선시대에 유교문화가 성행하여 불교문화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지역...

1947년 지림사 터에서 마애불상이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보로 지정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다.

인위적으로 깎아내고 오랜 비바람으로 풍화된 모습...

그러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모습...





새로 깨끗하게 지어진 지림사.

대웅전 뒤편 바위에도 마애불과 마애탑이 새겨져 있다.


이번에 꼭 보려고 했던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선다.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산108-2번지





가평리 계서당(이몽룡 생가)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에서 약 10여분 거리에 가평리 계서당이 있다.

집 앞에는 사과나무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중이었다.



가평리계서당 (佳坪里溪西堂)


중요민속문화재  제171호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또한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이 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자료)


앞쪽이 대문채이고, 자동차가 있는 곳이 사랑마당.

사랑채 왼쪽 중문을 통해 들어가면 안채이다.





대문




가평리 계서당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보이고

계서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랑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 왼쪽으로 보이는 문이 안채로 통하는 문.




계서당 사랑채




조선의 로맨시스트 이몽룡~

이몽룡(성이성)의 생가로 알려진 계서당...

이 집의 주인이었던 성이성은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의 아들로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라고 한다.

그래서 계서당은 이몽룡 생가로 통한다.


춘향전은 우리나라 대표적 고대 소설 중 하나로

남원 부사 아들 춘향 사랑 이야기가 중심 내용이다.

주인공인 이몽룡이 실존 인물인 계서 성이성이란다.

 '준중미주 천인혈'이라는 한시는

실제 성이성이 지은 한시라고 한다.

춘향전에서는 '금중미주 천인혈'로 나온다는...




고개를 삐죽 내밀어 안채를 들여다보니

다른 분이 먼저 오셔서 주인 어른과 대화 중이었다.

우리를 보더니 주인 어른도 얘기를 나누시는 분도 얼른 들어오라고 하신다.

주인 어른은 성이성의 13대손...




안채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겨울이라도 이곳에 들어서면 춥지 않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마루에 앉으니 바람도 없고

따스한 햇살만 고요히 머물렀다.




'정중동(靜中動)'~

'조용한 가운데 어떠한 움직임 있다'...

저 글을 보니 그동안 숨어 있었던 춘향전의 얘기들이

당장 현실로 살아 튀어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안주인(종부)이 담근 갖가지 술 등이 가득하였다.

안주인께서는 우리에게 선뜻 약차도 한 잔 내셨다.

부담 갖지 말라시며...

역시 시골 인심은 아직 살아있는 듯 싶었다.


종손 어르신 내외, 먼저 오신 분,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이어졌다.

춘향전, 이도령, 성이성, 그리고 우리 문화재 이야기...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는 학설을 처음으로 낸 분은

연세대 설성경 명예교수라고 한다.

성이성이 남원부사였던 부친을 따라 남원에서 보낸 게

12~16살 시기...

16살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성춘향과 만난 시기란다.


부친이 남원을 떠나며 성이성도 남원을 떠나게 되고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두 차례나 남원에 가게 되었단다.

첫 번째 어사 때는 스승을 만나 소년시절의 일을 얘기했다고 하며

두 번째 어사 때 적은 '암행록'에는

‘날이 저물어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광한루에 앉았다.

소년시절의 일을 거듭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어사화의 어사화판에는 ‘광한향악’이라는 네 글자가

남아있다고 한다.


성이성의 4대손인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에는

‘우리 고조께서 암행해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 지필을 달라 하여

樽中美酒千人血/盤上佳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

(준중미주천인혈/반상가효만성고/촉루락시민루락/가성고처원성고)

라 적고, 이어 암행어사 출두가 외쳐졌다…’


종손 어르신께서 관련 유물을 기탁하며

이몽룡과 성이성 관련성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춘향전에서의 이몽룡과 실제 성이성의 사랑 이야기의 결론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춘향전의 이몽룡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거라니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 아닌가!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ㅁ'자형 집...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바라본다.

얘기를 풀어가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정말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나 갈 길이 멀기에

무겁게 눌러붙은 엉덩이를 들어야만 했다.




사랑채 옆 성이성 사당을 지나며...

계서 성이성의 묘는 외가가 있는 영주에 있다고 한다.




보호수인 옆으로 누운 이 소나무는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단다.

성이성의 조부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주변의 소나무들과는 다른 종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성이성의 실제 이야기를 알겠지~




산허리 밭에서 본 계서당 풍경




보호수 소나무까지 본 후 계서당을 떠나려 하는데,

종손 어르신과 다른 방문객이 대문 앞에서 얘기를 나누신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문객은 아마도 문화재 관련 일에 종사하시는 분

아니면 그 방면에 아주 관심이 많은 분 같았다.

정이 무엇이길래

우리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다시 합류...


이곳저곳 민속마을들을 많이 돌아보셨다는 종손 어르신 말씀에

내 고향 '한개마을' 얘기를 꺼냈더니 거기도 가 보셨단다.

작은 것 하나에도 유대감이 느껴지고......

그렇게 한참을 더 머물고 나서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 가평리계서당 (佳坪里溪西堂) >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여행이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지만

봉화에서 국보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접하고

춘향전의 실존 인물이었던 이몽룡(성이성) 생가까지 돌아볼 수 있어서

두고두고 행복할 것 같다.



2015.12.25(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