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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봉화] 봉화 기행 4 - 백두대간 수목원 주변 , 조선왕조실록의 수호사찰이었던 각화사

[경북 봉화] 봉화 기행 4 - 백두대간 수목원 주변, 조선왕조실록의 수호사찰이었던 각화사


<봉화기행 여정>

<봉화읍> 닭실마을(청암정, 충재박물관)-후토스 촬영지

-석천계곡(석천정사)-삼계서원-유기마을

<물야면>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계서당(이몽룡 생가)-축서사-오전약수

<춘양면> 백두대간수목원 주변-각화사-(동궁식당-석식)-(춘양-1박)

-(강남회관-조식)-춘양시장-한수정-만산고택-권진사댁-서동리 삼층석탑

<소천면>분천 산타마을


 

 지금은 폐관된  춘양목 산림체험관.

백두대간 수목원이 개장되면 다시 체험관으로 이용되리라... 



2015.12.25(금)

 

오전약수를 끝으로 봉화 물야면을 떠나

주실령을 넘어 '억지 춘양'의 고장인 춘양으로 간다.

사전적인 용어는 '억지 춘향'으로 쓰이지만

이 고장에서는 '억지 춘양'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풀어보기로 하고...

봉화의 약수터 중 하나인 두내약수터를 찾았지만

주변이 공사 중으로 어수선하다.

수목원6교를 건너와 금강소나무 군락지쪽으로 향하였다.

 



문수산 기슭으로 오르면 춘양목 산림체험관이 있다.

예전에는 춘양목 공예를 체험할 수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폐관...

주변은 백두대간 수목원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온통 공사 중이다. 


 

건물 못 미처에 춘양목 군락지 가는 길 표시가 보이고...



춘양목산림체험관 건물 뒤편으로 오르면

주변에 널린 억새와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산풍경이 아름답다.



더 오르면 춘양목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춘양면 서벽리의 금강소나무숲에는

 약 1,500그루의 춘양목(금강송)이 자생하고 있다.
굵기도 평균 50cm가 넘는다.

1974년 채종림으로 지정되어
이곳에서 채취한 종자로 묘목을 키우고
전국에 보급했다고 한다.
2001년에 궁궐과 전통사찰 등의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 관리 중이고...

2006년 7월 이후 산책로를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금강송 숲길을 한참 걷고 싶었으나

남편은 아예 올라오지도 않고 차 안에 있다.

그러니 혼자서 내내 걸을 수도 없고......

잠시 걷다가 내려왔다.

수목원이 조성되고 나면 다시 와서 걸어볼 일이다.

 

 

체험관 왼쪽길 위로 올라가니

백두대간 수목원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알파인 하우스.

3개의 온실인 재배온실, 연구온실, 전시온실...

뒷산은 춘양목 군락지...



현재 조성 중인 온실들...

백두대간 수목원 조성 사업 관련 시설물들이다.


 

내려가는 길이다.

왼쪽길로 오르니 관련 건물이 서서히 드러나며

완공에 차츰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주변 조성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은 듯하다.

아무래도 예정된 개장 시기는 늦추어질 듯...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에는

종자저장시설, 알파인하우스,

소나무, 자작나무 등의 군락지,

각종 야생화, 식물원 등이 들어선다고 한다.

호랑이숲에서는 백두산 호랑이 4마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된단다.

야생의 모습~

정말 기대가 되는 일이다.

 


금강송 숲을 내려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주변은 온통 공사 중~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일대는

정말 천지개벽을 앞둔 장소처럼 보였다.

 

백두대간 수목원 사업...

정말 대단한 플랜을 가진 공사다.

예산도 엄청날 것인 데다가 미래 환경 측면에서도

정말 효과적인 사업이 되기를 바랄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각화사

 

 해는 슬며시 고개를 떨구어가고...

달려가는 나의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예정에 넣었던 태백산사고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915번 도로와 88번 도로가 만나는 곳에서

춘양쪽으로 길을 잡았다.

석현리 각화사 초입에서 산기슭으로 접어드니

울울창창한 숲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시원한 바람과 상큼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각화사



가파르긴 하나 포장도로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각화사에 도착했다.

조선시대에는 8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했다는 곳이다.

각화사 뒷산이 각화산인데,

원효대사가 남(람)화사(현 춘양중 자리에 있던 절)를

각화산 중턱으로 이건하면서 각화사(람화사를 생각한다는 뜻)라 한 것에서

각화산이라는 이름이 비롯됐다고 한다.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지에는 봉화 서동리삼층석탑 두 기가 남아있다.


 

 

돌담을 따라 옆으로 올라가 보았다.

장독대를 지나 마당 끝으로 삼층석탑이 있다.
 

 

각화사 삼층석탑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되며, 높이 2.9m. 

지대석 위에 하층, 상층 기단이 있고

기단 사이에 판석 1장이 끼워져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데,

비지정문화재라고 한다.



 

각화사676년(신라 문무왕16) 원효 창건.

 1101년(고려 숙종 6) 국사 무애계응(無礙戒膺)이 중건.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쳐,

1777년(정조 1)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 중의 하나인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하여

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한 뒤

8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하여 국내 3대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3년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사고와 절을 불태웠다고도 하고,

혹은 1945년 해방 후 소실되었다고도 한다.

1926년에 달현(達玄)이 법당을 비롯한 다섯 동의 건물을 중건,

 1970년에 금오(金烏)가 요사채를 중건,

1979년 범종을 주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사고 건물을 발굴하고 사고지를 정비하여

 1991년 2월 26일 사적 제348호로 지정됨.

 

중요문화재로는 귀부(龜趺)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는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것으로서,

시대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완전히 도괴된 것을 다시 모아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체감률이 낮고 상륜부가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각화사를 창건했던 676년은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해이기도 하다.

의상과 원효가 앞다투어 세운

축서사, 부석사, 각화사 등의 대찰...

서로 가까이에 이런 명찰들이 있었구나!

 

축서사처럼 각화사 대웅전도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렇게 높이 올라가야 대웅전을 만나는 사찰을 보면

앙코르와트 같은 유적이 생각난다. 
신의 세계는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아름다운 대웅전 문살에 절로 눈길이 간다.


 


늦은 시각, 잠시 눈인사만 하고 돌아서기로 하고...



 


불이 들어온 산사의 저녁 무렵...

겨울이라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태백산 각화사 현판이 걸린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조그만 삼층석탑이 보인다.


 

산 속의 저녁은 더 빨리 찾아오기에

5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벌써 불을 켜 놓았다.

 

 

 

예정에 두었던 태백산 사고지까지는 도저히 무리다.

다녀오려면  최소 1시간은 필요한데...

산 속의 밤은 너무나 빨리 찾아올 것이기에

결국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아~ 계서당에서 시간을 너무 보냈어!

이 험지를 언제 또 찾을 수 있을까~~~

긴 한숨을 토해 내고...

다음에 사고지가 복원이 되면 찾을 수 있을지...

아쉬움을 안고 춘양면 소재지로 향하였다.

 

 2015.12.25(금)

 

아래 설명은 태백산사고지에 가 보지 못한 진한 아쉬움으로

문화재청 자료를 찾아본 내용이다.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사적  제348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오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자리로

조선시대 5대 사고중 하나이다.

조선왕조는 오대산·마니산·적상산·춘추관·태백산에

각각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다. 

 태백산사고터는 경상감사 류영순이 추천하여

선조 39년(1606)에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었다가 이관되어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太白山史庫本)

 

국보  제151-2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료의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도 보장되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고 관계된 관리를 배치하여 펴냈으며,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하였다.

사료가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남아서 전해내려 왔다.

이 태백산본은 848책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 실록은

선조 36년(1603) 7월부터 39년(1606) 3월 사이에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만든 4부 중 하나이다.

그 이후 고종 2년(1865)에 만든『철종실록』에 이르기까지

실록이 편찬되는 대로 첨가되어 온 것으로,

선조 39년(1606)부터 1910년 일제시대까지 계속

태백산 사고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나 1930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었다가 이관되어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건물은 해방 전·후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였다. 

 실록각·선원각·포쇄각·근천관의 부속 건물터가 남아있다.
※(태백산사고지 → 봉화 태백산사고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문화재청 자료)

 

봉화 태백산사고지

- 태백산사고 소실되기전 모습(조선고적도보 게재 사진) -

(문화재청 자료)


우리의 역사를 보존했던 자랑스러운 건축물이자

자연스러운 미가 돋보이는 건축물~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 각화사 >

전화번호 : 054-672-6120

주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