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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생가(육우당) / 이원영생가

이육사문학관 (2023.11.03.금)

 


 

 

농암종택을 나섭니다.

해가 짧아지니 돌아볼 시간도 많이 줄었습니다.

이어서 이육사문학관을 들를 예정인데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부지런히 가야겠습니다.

퇴계종택 앞을 지나갑니다.

더 안쪽으로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있습니다.

 

 

퇴계종택 (退溪宗宅)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앞면 6칸·옆면 5칸 규모의 ㅁ자형 집으로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높은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지었으며,

전면에 솟을대문을 갖추었다.

오른쪽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인데

마루에는 ‘도학연원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화재청 자료)

 

 

퇴계종택은 대충 보고 갑니다.

이육사문학관을 돌아보려면 여기서 지체하면 안 될 것 같군요.

 

 

 

부지런히 달려서 이육사문학관에 도착합니다.

길 맞은편 아래로 주차장과 생태경관녹지가 아주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육사문학관입니다.

전시관을 돌아본 후 나오며 찍었네요.

 

 

이육사문학관과 원촌마을 위주로 돌아보게 됩니다.

 

 

 

이육사 동상 <절정(絶頂)> 시비

 

이육사 (1904~1944)

퇴계 이황의 후손, 저항의 깃발을 치켜들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6형제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은 원삼(源三)이었고 훗날 활(活)로 개명했다.

자(字)는 태경(台卿),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다.

 

장진홍사건과 대구격문사건에 휘말리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신문지에 싸인 커다란 선물상자가 배달되었다.

은행 직원이 수상하게 여기고 길거리에 내놓자마자 그 안에 담겨있던 폭탄이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하면서

경찰 4명을 포함하여 도합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깜짝 놀란 대구경찰서 순사들이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무차별로 잡아들인 다음

야만적인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이때 이육사는 형 이원기와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렀다.

평생 17차례에 걸친 체포와 투옥의 시발점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

일본 오사카에서 진범 장진홍이 체포되면서 이육사의 형제들은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경찰은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그들을 석방했다.

한편 장진홍은 사형을 선고받자 이듬해인 1930년 7월 31일 자결함으로써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아호 ‘육사(陸史)’에 얽힌 사연!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죄수번호 264번을 빌려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는 호를 썼다.

그러다 반드시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불행한 역사를 뒤엎겠다는 의지로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사용한 ‘육사(戮史)’로 바꾸었다.

도중에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의 ‘육사(肉瀉)’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어른 이영우가 ‘육사(戮史)’란 호는 너무 노골적이라 일제의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무난하게 평평한 산꼭대기를 뜻하는 ‘육(陸)’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 조언을 받아들여 ‘육사(陸史)’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어로 가득 차 있다.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 시에 대하여 평론가 김용직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든든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청포도〉, 〈절정〉, 〈황혼〉 등에는

암울한 식민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지식인의 고통스런 현실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투철한 의지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다음백과에서...)

 

 

 

 

이육사문학관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았다.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이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에

그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설립, 개관하였다.

2017년 1월에 전시관, 생활관, 복원한 이육사 생가로 증축하여 재개관 하였다.

(이육사문학관 자료 중~)

 

이육사문학관(전시관, 정신관) 매표소 입구.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생활관(연수원)이고요.

 

* 개관시간 : 3월~10월 : 09시 ~ 18시(입장마감은 17시 30분)

                      11월~2월 : 09시 ~ 17시(입장마감은 16시 30분)

* 휴관 :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 전화 : 054)852-7337

* 관람요금 : 성인 기준 2,000원

* 무료대상 : 65세이상, 7세이하, 장애인, 국가유공자

 

민족시인 육사 이원록선생상

17번의 감옥생활, 1927년 첫 옥살이,

1930년 첫 시 <말> 발표, 1944년(40세)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

 

 

 

 

 

 

이육사의 난초 그림 <의의가패(依依可佩)>

 

 

 

 

본명은 이원록.

경북 안동에서 태어남(1904.05.18.).

퇴계 이황의 14대 손.

장진홍의거에 엮어 옥고를 치렀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기자생활과 항일투쟁을 함께 펼침.

이후 주로 '육사(陸史)'와 '활(活)'이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글 발표.

<자오선>, <영화예술>, <풍림> 동인으로 활동.

20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거듭 옥고를 치름.

 

 

1943년 가을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40세)

 

 

학창시절에 모두들 외웠을 시 <청포도>~

≪문장(1939)≫에 실린 시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 이야기

원촌은 본래 '말맨데', 즉 말을 맨 곳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먼먼데'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먼 곳, 즉 지금의 '원촌(遠村)'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선조에 훌륭한 자손이로군요.

안동에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많았네요.

 

 

 

어머니 회갑연 기념 병풍

12폭 병풍에는 이육사 형제와 사촌형제가 맡은 역할이 적혀 있습니다.

"장자인 원기는 축하 글을 쓰고, 육사는 술을 올리고,

원일은 병풍 글씨를 썼으며, 원조는 병풍 글을 읊었고, 

원창은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으며, 사촌 원균은 꽃을 올렸다."

옛날 당시 환갑잔치의 순서와 장면 모습 그대로 떠올리게 만드네요.

 

 

 

 

 

북카페 <노랑나븨>

바라보이는 풍경이 멋진 곳입니다.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어도 참 좋을 것 같아요...

 

 

 

 

 

 

 

 

 

 

 

 

 

 

 

 

1943년 가을 경, 이육사가 동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북경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이송될 때

청량리역에서 딸 옥비가 보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푸른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채 용수를 쓴 모습이었다고 하고요.

육사는 마지막 길임을 직감했는지 어린 딸 옥비의 볼에 얼굴을 대고 손을 꼭 쥐며

"아빠 다녀오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 아픈 역사네요.

 

 

1935년 ≪신조선≫에 실린 시 < 황혼(黃昏)>

 

 

 

 

 

1938년의 ≪비판≫에 실린 <강(江) 건너 간 노래> 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불국사에서(최용, 신석초, 이육사), 중국어 성경

 

 

육사는 멋으로 안경을 썼다고 하네요.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자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던 항일 민족시인입니다.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의 의지를 불태웠고

생애 후반에는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였습니다.

이런 훈장은 당연한 거고 오히려 부족한 거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찾고

그분들의 애국의지를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육우당(이육사 생가)

문학관 맞은편 언덕에 복원된 이육사 생가가 있어요.

육사는 이 집에서 열여섯 살 되던 해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본래 문학관 인근 원촌마을에 생가가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안동 태화동으로 이건되었고요,

소유주가 바뀌며 원래 모습을 잃어

고증을 거쳐 이곳에 복원을 했대요.

육형제의 우의를 기리는 뜻으로 육우당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문이 닫혀 있어 밖에서 바라봅니다.

 

 

도로변에서 육우당과 이육사기념관 가는 오름길

 

 

이육사문학관을 돌아본 후 다시 길가로 나옵니다.

바로 옆 산에 이육사의 묘소가 있어서 가 보고 싶었으나

뭣하러 거기까지 가냐며 그냥 패스하자고 압박이 들어옵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네요...

 

 

 

 

바로 인근 원촌마을로 향합니다.

이육사생가터(현재 청포도 시비공원 내)와 이원영 목사 생가가 있습니다.

 

 

 

청포도 시비공원

잔디마당과 이육사 생가터가 있는 공원.

<초가(草家)> 시비

 

 

이육사 생가터

육우당유허지비

 

 

이육사 육형제가 태어난 집터라는 설명이 쓰인 비

 

 

 

이육사 시비

이곳에 시비를 세워 이육사 생가터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포도 모양 일곱 개의 화강암 위에 육사의 모습과 <청포도> 시를 새긴 비를 얹었네요.

 

 

뒷면에는 이육사의 생애에 대해 기록해 놓았고요.

 

 

 

원촌마을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경입니다.

저기 위로 보이는 건물이 원촌마을의 원대정인가 봅니다.

 

 

 

이원영 목사 생가 (사은구장)

이원영 목사 생가에는 '사은구장(仕隱舊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사은구장=사은 이귀운의 옛집으로 보면 되겠네요... 

이원영 목사는 사은 이귀운의 6대 손이 되나 봅니다.

퇴계의 14대 손이고요...

 

이원영 생가 옆으로는 원대종택, 목재고택이 나란히 있습니다.

안동에는 참 많은 고택들이 있습니다.

양반 고장 맞네요...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의 묘비

원래 산소는 안동 풍산면에 있었으며

1999년에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이 비는 이장 당시 땅에 묻었던 것인데, 생가 뒤편에 옮겨 세웠네요.

 

이원영 목사 생가는 관리가 잘 안 되어 보이는군요. 

쇠락해가는 모습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어떤 모습일까요?

잠시 숙연해지네요.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항일의지를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런 분들 덕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2023.11.03.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