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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안동] 고산정 / 강호문학의 창도자 농암 이현보 - 농암종택, 분강서원, 애일당

경상도 여행기를 이어갑니다.

봉화 청량산에서 내려와 안동의 몇 곳을 보러 갑니다.

고산정~농암종택~이육사문학관~도산서원~선성현문화단지

~월영교 주변~용계리은행나무~만휴정~묵계서원...

 

처음 들르게 되는 곳은 청량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산정입니다.

고산정은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람객이 다녀가는 장소가 되었지요.

최근에는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에도 등장하였고요.

 

 

고산정(孤山亭)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난수(1530∼1599)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명종 19년(1564)에 이미 예안에서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어서 당시 선성(예안현)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가송협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자’라 하였다.

고산정은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서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곳으로

퇴계 선생의 시와 금난수 선생의 시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자료)

 

고산정 독산

가송리마을회관 인근의 전망대에 올라 바라봅니다.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가 언덕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고산정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는 독산이 우뚝 솟은 모습입니다.

 

 

고산정 맞은편의 독산(獨山)은 고산(孤山)으로도 불리던 산이라지요.

풍수학자들은 '거북이가 물에 잠겨 죽은 형상'이라 하여

구사잠수(龜死潛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곳과 고산정을 나룻배로 건너다녔었네요.

 

 

독산쪽에서 바라본 고산정

 

 

고산정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지며 많은 관람객이 찾는 고산정입니다.

최근에는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에도 나왔지요.

청량산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더니 폰 배터리가 나갔습니다.

에효~ 이제부터는 남편 폰 빌려서 최소한으로 몇 장씩만 찍어야겠습니다.

 

 

 

 

 

고산정을 떠나 인근의 농암종택으로 갑니다.

낙동강이 휘돌아가는 곳~

농암종택도 강을 가까이에 두고 자리한 고택이지요.

길가의 은행나무가 곱게 물들어 객을 반깁니다.

 

 

 

 

 

농암종택

농암 이현보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

직계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다.

분강촌 건물들 전체배치도입니다.

(농암종택 홈페이지 자료)

 

 

농암종택

 

 

농암종택 건물배치도

 

 

강호문학의 창도자, 이현보에 대한 설명 안내판.

강호 문학~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사는 삶을 그린 문학 작품.

중종실록, 명종실록, 퇴계집에 기록된 농암 이현보 관련 글들이 적혀 있네요.

 

 

농암 선생 영정과 설명 부분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농암 이현보( 聾巖 李賢輔, 1467~1555)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저서로 <농암문집>.

대표작으로 <어부가>.

현재 전하는 시조는 8수라고 합니다.

농암 선생에 대한 연보를 농암종택 홈페이지에서 불러왔습니다.

농암 연보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예요.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셨네요.

 

당시 농암가문은 장수하기로 이름난 가문입니다.

농암을 중심으로 농암 89세, 아버지(欽) 98세, 어머니(안동권씨) 85세, 

조부(孝孫) 84세, 조모(청주양씨)77세, 증조부(坡) 76세, 고조부(軒) 84세,

동생들(賢佑, 賢俊)이 91세, 86세,

아들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3세, 윤량 74세, 숙량 74세,

문량의 증손자(榮運)와 고손자(養直)도 94세, 82세,

숙부 99세, 조카인 충량(忠樑)과 수량(遂樑)이 71세, 89세,

외조부(權謙)93세, 외숙부 두 분(權受益, 權受福)이 93세, 73세, 외사촌(權矩)이 85세.

1500년대 평균 연령 80세~

그것도 7대 200여년에 걸쳐 계속되었다니

현재에 비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장수가문이네요.
(농암종택 홈페이지 자료 중 발췌)

 

 

농암종택에 대한 안내 설명입니다.

 

농암종택은 농암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으로

직계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집입니다.

최초로 이 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입향시조인 이헌(李軒)으로

농암 선생의 고조부라고 합니다.

고려말에 영천에서 서울로 내왕하다가 이곳 산수를 사랑하여 

살 곳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농암 선생이 '불천위'로 모셔졌기에 '농암종택'으로 부른답니다.

2,000여평 대지 위에 본채(사랑채, 안채, 사당, 별채, 문간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

'긍구당(肯構堂)'은 1370년 전후에 이헌이 지은 건물.

'명농당(明農堂)'은 1501년 선생의 나이 44세 때 귀거래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습니다.

(안내 설명에서...)

 

 

'분천헌연도' 부분도 확대해 봅니다.

 

 

농암선생고택 대문채를 들어섭니다.

걸어오시는 분이 농암종택에 거주하시는 종손이십니다.

오래 머물 시간이 부족하여 따로 설명을 듣지는 않고

그냥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 관람객은 11:00 ~ 15:00에 방문 가능하고

16시까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별채, 긍구당, 사랑채가 보입니다.

바깥마당이 아주 넒습니다.

 

 

농암종택 사랑채와 사당.

사랑채 뒤로 안채가 있습니다.

 

 

권씨부인의 선반가(宣飯歌)

'먹기도 좋구나 승정원 선반이여

놀기도 좋구나 대명전 기슭이여

가기도 좋구나 부모 향한 길이여'

 

이 노래는 농암이 승진하여 귀향하니 어머니가 기뻐서 노래한 작품입니다.

이 노래가 지어진 연유를 농암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526년 여름에 진해지방 관원들의 비리가 있음을 조사하라는 특명을 받고

달이 넘도록 분주히 다녔으나 끝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유서가 내려와 보니

뜻밖에 당상관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어버이가 계신 고향 예안에 잠시 들러 이 사실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가 기뻐하시면서 눈물을 흘렸다.

마침 서울 친구가 보낸 '옥관자'가 도착하여

곧 부모님 앞에서 망건을 풀고 옥관자를 달았다.

이에 어머니께서 손으로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옥관자에 구멍이 많아 꿰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 하시어

내가 우스개로 답변하기를

'다는 것이 어렵지 어찌 꿰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하니

온 집안이 기쁘게 웃었다.

 

다음해 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여가를 얻어 찾아뵈오니

어머니께서 미리 소식을 듣고 언문노래를 지어 아이 계집종에게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노래가 '선반가'였다.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인 문절공(김담 金淡) 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았던 까닭이다.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경향으로 벼슬길 다닌 것이 어언 40년,

어버이를 모신 지가 이미 여러 해이나 오직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즐거웠다.

이때 감사 신상(申鏛)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수연을 베풀고 축하시를 지었다.

즐거웠던 추억과 지은 시들을 버릴 수 없어 작은 책을 만들었다.

아울러 동양의 시를 애일당에 감추어 두고 후손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도록 했다. "

 

(안내판 내용~)

 

 

사랑채 뒤로 안채와 사당

 

 

별채와 긍구당

 

아래 글은 1544년 신재 주세붕 선생이 청량산을 가던 도중에 농암 선생을 예방했을 때

농암 선생과 농암종택을 묘사한 글이라고 합니다.

 

"농암을 분강(汾江)가로 찾아뵈오니, 공이 문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방에 들어가 바둑을 두니 곧 술상이 나왔다.

공의 아들 문량(文樑)은 자(字)가 대성(大成)인데

모시고 있다가 '축수의 노래(壽曲)'를 불렀다.

나와 대성이 일어나 춤을 추니 공이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춘추 78세로 내 아버지의 연세여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누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긍구당

 

긍구당

농암 가문의 종택에 속한 별당입니다.

종택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1370년 경 건립)

영천이씨 집안 안동 입향조인 이헌이 고려 후기에 처음 지었습니다.

농암 선생 살아계실 당시에 아주 낡은 상태였으나

아들 이문량이 다시 고쳐지었다고 합니다.

 

 

긍구당은 본래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운곡리로 옮겨졌고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다시 지었다고 하네요. 

 

 

긍구당과 농암 이야기.

농암이 85세 생일에 친지들의 축하시를 받아들고 그 감격을 '생일가' 한 수로 표현했네요.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壽夭)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인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님 은혜일세'

 

 

전면의 현판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신잠이 썼다고 하네요.

긍구당이라는 이름은 이현보가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 지은 것으로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받으라'

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현보의 바람대로 현재에까지 긍구당도 종택도 가문도 이리 이어지니

참 대단하고 부러운 가문입니다.

 

 

긍구당, 사랑채, 별채가 보이는 종택 모습

 

 

긍구당 앞에서 바라본 대문채

 

 

긍구당에서 명농당, 분강서원, 애일당 가는 길

 

 

 

명농당

 

명농당

1501년 농암 44세 때 고향에 '명농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를 그렸다고 합니다.

4년 뒤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러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 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고 하네요.

1542년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임금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

모든 대신들이 참석하는 전별연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농암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효빈가( 效嚬歌 )'라는 감격적 소회의 시조를 읊었다고 하네요.

 

 

명농단 권역

 

 

 

분강서원

1699년 후손과 사림이 농암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현재는 숙박체험교육학습의장으로 활용되고 있고요.

분강서원 건물배치도입니다.

 

 

 

분강서원 정문(유도문)

 

 

서재(경서재)와 동재(극복재)

동재는 학생 기숙사, 서재는 교무실 겸 선생님방

 

 

분강서원 강당과 오른쪽으로 농암사당(숭덕사)

분강서원은 1699년 후손과 사림이 농암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강당 흥교당은 교실, 흥교당에 딸린 방 성정재는 교장실이라고 하네요.

 

 

농암사당 (聾巖祠堂)

 

조선 중기의 학자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위패와 초상화인 별본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분강서원에 딸린 건물이다.

원래 도산면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이현보는 시조작가로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문인이며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문화재청)

 

 

분강서원 강당 농암사당(숭덕사)

 

 

한속정사 바깥채, 바깥채 뒤로 안채가 보입니다.

한속정사 건물은 행정실로 보면 되네요.

 

 

농암신도비 (聾巖神道碑)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인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을 기리고 있다.

농암은 연산군 4년(1498) 32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잘못됨을 지적하다 안동에 유배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복직되었다.

56세 때에는 성주목사가 되어 민심을 잘 다스려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76세 때에는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시를 지으며 남은 생을 보내었다.

조선시대의 자연을 읊은 대표적인 작가로 국문학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각 안에 모셔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윗변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조선 명종 20년(1566) 2월에 세운 것으로,

홍섬(洪暹)이 지은 글과 송인(宋寅)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다.

 

(문화재청 자료)

 

이현보 신도비 탁본 앞면 (농암종택 홈페이지 자료)

비는 대리석 차돌로 되어 있어 안동지방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500여년이 지난 아직도 한 글자도 마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암 가문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비네요.

 

 

 

강각·애일당(愛日堂)

강각·애일당 건물배치도

 

애일당(愛日堂)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문신이자 학자인 농암 이현보(1467∼1555)의 별당이다.

농암 선생이 이 집을 짓고

94세의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애일당은 중종 7년(1512)에 처음 세워졌고,

명종 3년(1548)에 고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원래는 낙동강 안의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농암 선생의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문화재청)

 

강각 애일당

 

 

애일당

1512년, 농암은 ‘효(孝)’를 실천하고자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애일’은 ‘날을 아낀다’는 뜻이니,

‘애일당’은 곧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뜻의 집’이다.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 자신이 이미 이때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다.

 

농암의 이런 효행은 조정으로 알려졌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박상, 이행, 소세양, 정사룡, 이장곤, 김세필, 이장곤, 어득강 등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 시를 보냈으며,

김안국, 이언적, 주세붕, 이해, 이황, 조사수, 임내신, 황준량 등의

인사들이 끊임없이 예방하였다.

 

이런 농암의 효행은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大字)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농암종택 500여년을 이어오는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이 같은 측면은 첨예한 당시 정계 동향에서 정의로움으로 조화를 잃지 않았던 농암의 인격을 반증하는 것으로,

농암에게는 귀거래의 정서로 귀착되고 있다.

 

(농암종택 홈페이지의 설명 자료)

 

‘애일당’ 현판 글씨는 중국 제2명필에게 받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명필 글씨라고 합니다.

농암 선생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친구에게 부탁했다네요.

 

 

강각 농암 각자

 

강각

 

‘강각(江閣)’은 1512년 전후, 애일당 아래 분강의 강가에 농암이 지은 집으로,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곳에는 퇴계뿐만 아니라 김안국(金安國), 이우(李堣), 이언적(李彦迪), 주세붕(周世鵬),

이해(李瀣), 황준량(黃俊良), 조사수(趙士秀), 임내신(任鼐臣) 등의 많은 명현들이 함께했다.

그런 분위기의 풍류에서 나온 작품이 농암의 ‘어부가(漁父歌)’였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송순(宋純)-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농암종택 홈페이지의 설명 자료 중 발췌)

 

 

 

농암 각자

 

분강(汾江), 농암(聾巖)에 대한 농암선생의 기록은 이러하다.
“바위는 언문에 귀먹바위(耳塞巖)라 했다.

앞강은 상류의 물살과 합류하여 물소리가 서로 향응하여 사람들의 귀를 막으니,

정녕 귀먹바위의 이름은 이로써 유래한 것인가!

승진, 좌천에 달관한 은자가 산다면 진실로 어울리어 농암이라 하고,

농암이라 하고, 늙은이가 자호로 삼았다.

동쪽 긴 강은 멀리 청량산 만학천봉 사이를 구비 돌아 반나절 정도 흘러와 관어전(官漁箭)에 이른다.

빼어난 모습은 긴 성과 같고 바위들의 충격으로 깊은 소(沼)를 이루는데,

이소를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이곳부터 물결은 점점 완만해져서 그 모습이 징. 홍. 청. 격(澄弘淸激)의 모습을 이루어 드디어,

그 물굽이가 농암 아래에 이르면 넓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만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汾江)이라 했다.”

 

애일당도 처음에는 농암 주변 자연암석에 누각 모습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 후 홍수로 유실되자 대를 쌓고 위로 올려 짓고,

그 암석에는 농암(聾巖) 선생(先生) 정대(亭臺) 구장(舊庄)이라고 기념 글씨를 써서 음각했다.

농암 선생 정자 옛터라는 뜻이다.

한말 진사 이강호(李康鎬)의 글씨로 한 글자의 크기가 75cm가 되는데,

이와 같은 큰 글씨는 다른 곳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댐으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글자부분만을 절단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에 농암이 농암에 올라 지은 유명한 농암가는 이러하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 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농암종택 홈페이지의 설명 자료 중 발췌)

 

 

농암종택 앞으로는 낙동강이 굽이지며 흘러갑니다.

여유롭게 강가를 산책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져도 참 좋은 곳입니다.

농암종택 한옥스테이를 즐기며 하루 유하고 간다면 더 좋은 곳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대충만 돌아보고 농암종택을 나섭니다.

두고 가기 많이 아쉬운 농암종택~

농암과 종택의 기를 잔뜩 받아가지고 갑니다.

 

(2023.11.03.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