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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부 동헌 - 내삼문,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 충신당, 망미루(동래도호아문)~

동래부 동헌 입구 (2020.8.5. 수)

(2020.8.5.수)

동래읍성 북문을 내려와 동래부 동헌으로 이동한다.

동래부 동헌 앞에 차를 세워준 남편은 돌아다니기 귀찮다고 차에 있겠단다.

할 수 없이 혼자서 잠시 동헌이나 돌아볼 수밖에......

날씨도 덥고 너무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주변의 다른 곳들은 포기해야겠다.

또 기회가 있겠지...

동래시장과 동래 만세 거리. 복잡하다. 직진하면 동래시장, 오른쪽길이 동헌 가는 길...
동래 만세 거리. 동래시장 못 미처서 오른쪽길~ 동래부 동헌으로...
동래부 동헌. 왼쪽부터 망미루(동래도호아문), 찬주헌, 동래독진대아문(동래부동헌 외대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동래부 동헌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 東萊獨鎭大衙門)

이 문은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사적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조선 후기에 동래부는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국방과 외교상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다른 고을에 비해 관아의 수도 많았고, 규모도 컸다.

이 문의 첫 건립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동래부 동헌을 건립할 때 함께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870년(고종 7)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건한 것이다.
솟을삼문 중앙에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것은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 진관(慶州鎭管) 소속에서 독립하여

동래 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아래 좌우의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교린선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뜻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때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 문은 우리 고장에 남아 있는 전형적인 관아 대문이다.

규모는 작으나, 3문 형식의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지붕은 솟을대문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천정의 밑에 홍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원래 외삼문(外三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동래부 동헌의 대문으로 망미루 뒷쪽에 있었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8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출처: 문화재청)

 

동래부 동헌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

솟을삼문 중앙에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독립되어

동래 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 원래 망미루 뒷쪽에 있었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안으로, 2014년 8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짐.
동래부 동헌 외대문 설명. 동헌 길 건너편에 외대문터 표시가 있다.
동헌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0호 동래부 동헌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동래는 일본과 최접경지로서 한반도 제일의 관방이자 전략요충지로 중시된 만큼

일찍부터 읍성과 관아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시되어

태조 때부터 진을 두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12년(1547)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 6년(1655)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것을 독진(獨鎭)으로 독립시키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개축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를 겪고,

부사 정현덕의 주도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읍성과 관아를 대대적으로 증·개축하였다.

그러나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충신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왔으며,

2015년 고마청을 복원하였다.

동래부 동헌 일곽은 조선시대 부산(동래)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제일 관방의 위상을 함축하는 관아시설일 뿐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개혁성론에 따라 근대적 읍성의 축조가 최초로 구현되는 등

조선시대 관방역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출처: 문화재청)

동래부 동헌 대문 (내삼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동래부 동헌 충신당

동헌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충신당에는 그 부속건물로 좌우의 연심당(燕深堂), 독경당(篤敬堂)과

대문, 외대문, 그 바깥 문루인 망미루가 있었다.

그러나 연심당은 파괴·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외대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만은 본래의 위치에 외롭게 보존되고, 부지(敷地)는 축소되었다.
현재의 충신당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여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이라는 편액(扁額)을 붙인 뒤로 충신당이라 일컬어졌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는 동래군청 건물로 사용되었고,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에 편입되면서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다가

1977년 부산직할시에 매입되어 초석 이상이 해체·복원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2013년 5월 8일 지정명칭이 동래부 동헌에서 동래부 동헌 충신당으로 변경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 충신당은 우리나라 고유의 목조기와 단층집으로

원래는 양옆에 방, 가운데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동래군청 등으로 사용되면서 방은 모두 없어지고, 마루로 되었으며,

건물 앞면에는 각 칸마다 분합문(分閤門)이 부착된 현재와 같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충신당은 동래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많이 개조된 데다

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의 재료가 대부분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고 있으나,

부산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유일한 동헌의 중심 건물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동래부 동헌(아헌) 충신당.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
충신당과 담장 끝의 선정비군
동래부사 선정비(왼쪽 1, 2), 영세불망비, 부윤 선정비(오른쪽)
충신당과 연심당. 연심당(오른쪽)은 부사의 관사나 6방 관속 등 이임 관원들의 대기소로 쓰였다 함.
좌우로 동래부 동헌 내삼문과 충신당. 가운데 뒤로 외대문과 찬주헌.

 

 

부사의 경호를 맡았던 비장의 처소인 찬주헌(왼쪽)과 부사의 휴식 공간 등으로 쓰인 독경당(오른쪽)
부사의 휴식 공간인 완대헌
징발한 말을 관리하던 고마청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망미루 (望美樓. 동래도호아문)

 

이 누각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위치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건되어 동헌 안으로 들어왔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높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놓여 있다.

팔작(八作)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며, 두공(枓栱) 양식은 2익공(二翼工)이다.

마루는 귀틀마루이며,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처마는 부연(浮椽)이 붙은 겹처마이다.

이 누각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문루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출처 : 문화재청)

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 1919년 동래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 1930년경 금강공원 주변으로, 2014년 12월 현 자리로 옮겨짐
담장 밖으로 동래시장이 보인다.
망미루 앞 찬주헌 옆에서 바라본 동헌. 왼쪽으로 독경당, 충신당, 연심당이 이어져 보이고, 오른쪽은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
찬주헌(왼쪽), 고마청(가운데 뒤), 독경당(오른쪽)
한 바퀴 돌아 동헌 내삼문을 다시 만나며... 오래되었을 법한 향나무도...

일제강점기에는 충신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이 철거되는 불운을 겪었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망미루에서의 만세 삼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고 싶었을 것이다.

1930년 경에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졌던 내주축성비도 일제강점기에 금강공원으로 옮겨졌었지...

이후 도시 개발은 이전된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이루어졌고,

외대문이나 망미루는 이미 제자리를 잃어버린 상황...

늦었지만 2014년에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왔으며,

2015년 고마청을 복원.

동래부 동헌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라도 복원해 놓았으니 지나간 역사를 조금이나마 기억할 수 있겠네...

(2020.8.5.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