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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세계/터키,그리스+UAE

그리스 여행 18 - 고대 그리스 최고의 신탁지 델포이(델피) 유적

그리스 여행 18 - 고대 그리스 최고의 신탁지 델포이(델피) 유적


< UAE+그리스 전체 여정 >

2019.1.8.(화) 00:15 인천 출발~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두바이~아부다비(1박)

~그리스 아테네(1박)~산토리니(1박)~코린트(코린토스, 고린도)~올림피아(1박)~델피(델포이)

~메테오라(1박)~아테네(1박)~아부다비 경유~기내(1박)~1.16.(수) 11:45 인천 도착


고대 그리스 최고의 신탁지 델포이(델피) 아폴론(아폴로) 신전

(2019.1.13.일)


델포이(델피) 고대 유적지

델포이 고고학박물관에서 델포이의 여러 가지 출토물들을 본 후

고대 델포이 유적지로 향한다.

델포이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순례자들과 사절단이 몰려들었던

고대 그리스 최고의 신탁지였다.

이곳은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80km 정도 떨어진 곳,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델포이는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BC 8-6세기 무렵에는 아테네보다도 훨씬 번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한때는 감히 어느 나라도 범접할 수 없는 영험한 성지였으나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합의 힘이 약해지자

주변 열강들의 침략과 약탈로 주요 유적과 수많은 보물들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진 등으로 인해 지하에 묻혀 있던 유물들이 발굴되어

엣 델포이를 기억하게 됐다.



아래 내용은 다음백과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독수리 2마리를 각각 동쪽과 서쪽에 놓아주면서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게 했더니,

2마리의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 지점은 돌멩이로 표시되어 있고

그리스인들은 그 돌을 옴팔로스(세계의 중앙)라 했으며

그 주위에 신전을 지었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델포이에 있는 이 신탁소는

원래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것이었고,

거대한 뱀인 가이아의 아들 피톤이 이곳을 지켰으나

나중에 아폴론이 피톤을 죽이고 자신의 신탁소를 세웠다고 한다.

발굴 결과 델포이에는 미케네 문명 말기(BC 14세기)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델포이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BC 6세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BC 590년경 제1차 신성전쟁이 일어난 후 

델포이 순례자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있던 델포이 근처의 크리사 시를 파괴하고,

자유롭게 델포이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델포이는 인보동맹(隣保同盟)에 가담해 중심역할을 했고

BC 582년부터 재개된 범국가적 제전인 피티아 경기를 4년마다 개최했다.

이 무렵 델포이 신탁소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러

사사로운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델포이 신탁소의 조언을 청했으며,

이 신탁이 국가정책을 바꾼 경우도 많았다.

또한 그리스 본토에서 해외로 식민단을 내보낼 때에도 반드시 델포이의 신탁을 들었는데,

이곳의 명성은 그리스어권 지역 전체에 널리 퍼졌다.

BC 356~346년에는 포키스인들이 강제로 이곳을 점령하고

신전의 보물을 빼앗았다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에게 쫓겨났다.

그뒤 로마 시대 초기에도 종종 약탈당했는데

네로 황제가 델포이 근처에서 조상(彫像) 500개를 빼앗아갔다는 말도 있다.

그리스도교가 퍼지면서 이 유서 깊은 이교의 성지 델포이는 쇠락했다.

AD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를 반대한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

델포이 신전을 복구하려 했지만

델포이의 신탁은 황제의 열성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사라져버린 옛 영광을 한탄할 뿐이었다.

델포이 유적지에는 19세기말까지 카스트리라는 근대적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마을이 가까운 지역으로 옮겨지고

이곳은 델포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1892년에 시작한 발굴로 고대 성지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2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의해

각 폐허들이 어떤 건축물의 유적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백과 내용을 발췌)



델포이(델피) 유적지 안내도


웅장한 규모의 아폴론 신전,

신전 위쪽 터에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야외 극장,

신전 남쪽 울타리 중앙에 높이 솟은 대리석 기둥 위 스핑크스 상,

그 아래쪽으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가 늘어서 있다.

보물창고에는 신전에 바칠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고,

일부 봉헌물은 밖에 전시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의 아폴론 성역은 그리스 전 지역은 물론이고

 인근 외국에까지 알려지는 성소로 각인되었단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의 탐욕은 델포이의 존폐를 위협했기에

이곳에 봉헌물을 바치는 12개의 인근 국가들은

델포이를 성역으로 지키기 위해 인보동맹을 결성했다.

12 국가들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4년마다 우의를 다지는 피티아 경기를 주관했다고 한다.

기원전 582년부터 범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열렸단다.

4년마다 모든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상으로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4년마다 피티아 경기가 열린 것은

아폴론이 괴물뱀 피톤을 죽인 죄를 정화하고

대지의 여신이며 피톤의 어머니인 가이아의 노여움을

위로하기 위한 제전이었다고도 한다.

야외극장 위쪽으로는 6,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피티아 제전이 열렸던 운동 경기장(스타디움)이 있다.


<범그리스 경기>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네 가지 경기

* 올림피아 경기 - 범 그리스 대회 중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던 대회.

엘리스 근처에서 4년마다 열리며 제우스 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됨.

상으로는 올리브 관.

* 피티아 경기 - 델포이 근처에서 4년마다 열렸으며

아폴론(아폴로) 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됨.

상으로는 월계수 관.

* 네메아 경기 - 네메아 근처에서 2년마다 열렸으며

제우스 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됨.

상으로는 셀러리 관.

* 이스트미아 경기 - 코린토스 근처에서 2년마다 열렸으며

포세이돈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됨.

상으로는 소나무 관.


델포이 고고학박물관을 나와 고대 델포이 유적지로 향한다.


키 큰 사이프러스 숲 사잇길을 지나 매표 구역에...


매표소를 지나 아폴론 성역 표시를 만난다.


아폴론 성역 안내


아폴론 성역은

오늘날 로디니로 불리는 파에드리아다 서쪽 가파른 경사지에 있다.

아테나 프로나이아의 북서쪽 1,500m에 위치.

최고의 숭배신을 모신 곳...

호머는 델피 성역이 실로 최고 부의 장소였다고 말한다.

BC 6세기에 시프노스, 아테네, 코린트, 메가라, 보이오티아의 보물창고들이 지어졌다.

시간이 흘러 신상, 인간상, 세발의자, 기둥 등도...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 중 몇 가지만 보존되어 있다.

AD 2세기의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의 자세한 묘사 등과 같은

고대 저술가들의 묘사와 말로 옛 유적을 짐작하게 된다.


포이 유적지




경사진 언덕을 받치는 벽,

파르나소스 산의 위용...




경사진 언덕에 돌을 짜맞추어 넣어 무너지지 않게 했다.

오른쪽 길로는 아마 카스탈리아의 샘, 김나지움, 아테나 프로나이아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인가가 이 길로 지나가는 걸 보면서 잠시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러움...


로만 아고라

박물관을 나서 델포이 아폴론 신전을 향해 조금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당도하는 넓은 터가 로만 아고라 터이다.

이곳은 생필품은 물론

신전에 바칠 각종 제물이나 기타 종교물품을 팔았던 시장터 겸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던 곳...


로만 아고라

AD 4세기에는 이곳이 미팅과 상업의 장소였다.

오늘날에는 북쪽의 이오니아식 열주가 보존되고 있다.


로만 아고라

위쪽으로 열주 몇 개만 남은 아폴론 신전이 바라보인다.


로만 아고라의 열주들





로만 아고라에서...

번성했을 그 옛날의 영화를 그려본다.


아테나 프로나이아쪽을 바라보며...



아테나 신전과 톨로스가 있는 마르마리아라 불리는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


신성한 길(참배의 길) 안내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 '신성한 길'~

스파르타 봉헌물(리산드로스 혹은 제독), 아테네의 봉헌물(마라톤 전투 기념비), 트로이 목마,

오른쪽으로는 아르카디아 봉헌물 자리, 아르고스 왕의 자리 등...




신성한 길(참배의 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 스파르타 봉헌물(리산드로스), 아테네의 봉헌물(마라톤 전투 기념비)이 있던 자리를 지난다.

오른쪽으로는 코르키라(케르키라)의 황소, 아르카디아 봉헌물 자리 뒤편의 헬레니스틱 스토아 자리를 지나고...


왼쪽으로 이어서 아테네의 봉헌물(마라톤 전투 기념비) 트로이의 말 자리를 지나고...




왼쪽으로 테베를 공격하는 7인의 석상이 있던 자리도 지나고...

오른쪽으로 아르고스 왕의 자리도 지난다.


아르고스 왕의 대좌

신성해 보이는 파르나소스산 일부,

로디니(장밋빛 바위)산과 플레부코스(불타는 바위)산


성스러운 참배의 길을 따라

테베를 공격하는 7인의 석상, 타라티니안(타라노)의 봉납물 자리를 지나면

시키온의 보고와 시프노스의 보고터가 이어진다.


시키온의 보고시프노스의 보고를 차례로 만나며...


 참배의 길(신성한 길, 성스러운 길)에서...


시키온의 보고와 시프노스의 보고 설명


시키온의 보고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의 고대 도시, 시키온...

시키온의 보고도 많은 유물을 남겼다.

기원전 500년대 무렵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의 메토프 부조는 다양한 신화를 담고 있어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신화로 장식된 보물창고인 셈... 

부조로는 제우스의 아들들 디오스쿠로이,

카스토르와 폴룩스(폴리데우케스) 쌍둥이가 있다.

이 디오스쿠로이가 창을 들고 노획한 황소들을 몰고 가는 모습,

제우스가 황소로 변신하여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하는 모습,

가축과 사람을 마구 해친 난폭한 야수인 칼리의 멧돼지도...

황금양으로 추정되는 부조도...



시프노스의 보고

기원전 525년 무렵에 지어졌단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축된

에렉테이온 신전의 카리아티드의 원조가 아닐까...

기원전 5세기 때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기원후 2세기 경의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시프노스의 보고는 시프노스의 금과 은 개발 이익의

십분의 일을 바쳐 지었다고 한다.
현재 델포이 시프노스의 보물창고는 주춧돌만 남아있지만

복원도를 보면 당시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

주 기둥이 여인상으로 묘사된 카리아티드 양식을 띠고 있고

메토프와 박공에도 부조가 빼곡히 새겨졌다.

많은 그리스 도시들의 보고로 둘러싸여 있어

보물창고의 교차로로 불린다.


참배의 길(신성한 길, 성스러운 길) 꺾어지는 곳에 시프노스보고가 있었다.(사진 오른쪽)


시프노스의 보고 복원도(델피 고고학 박물관 자료)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자기네 도시의 위상을 높이고

아폴론의 신탁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신성한 길 옆에 보물창고를 세웠다.

고대 그리스의 아케익(아르카이크) 시기인 BC 525년에 시프노스 주민들도

델포이에 자기네 봉납물을 보관하기 위한 보물창고를 세웠다.

지금은 건물이 남아있지 않.

델피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러운 길(Sacred way)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시프노스의 보물창고

지금은 기단(플랫폼)만 남아 있고,

박공과 프리즈를 장식했던 돋을새김과 출입구의 카리아티드 여인상은 

델피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프노스의 보고 출입문과 여인상 기둥(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에 세워진

카리아티드 기둥 양식의 원형이 아닐까~~~


시프노스 사람들은 그들의 보물창고를 지었을 때

부유한 자신들의 행운이 오래 지속되겠는지를 물었다.

피티아의 대답은 해석하기 모호한 말이어서

신탁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고,

엄청난 보물을 봉헌했음에도 어려움을 당했다.

사모스섬 사람들이 침입하여 돈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했고,

그 이유로 사모스인들은 시프노스인들을 고립시킨 후

10배의 몸값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옴파로스 자리를 만난다.

앞 왼쪽이 옴파로스 자리.

보이는 건물은 복원된 아테네의 보고,

오른쪽으로 대리석 길이 이어진다.


옴파로스(배꼽, THE NAVEL)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옴파로스~



파로스와 무희 기둥

무희 기둥 제일 꼭대기에 옴파로스가 얹혀 있었다고 하는데,

아폴론 성역 여러 곳에 복제 옴파로스가 있었던 모양...

왼쪽 아래 사진은 가운데에 옴파로스가 그려진 단지(BC 425-410경)로

왼쪽에 아폴론과 헤르메스, 오른쪽에 아르테미스와 레토...


옴파로스(Ohmpalos)

아테네의 보고 아래 쪽에 복사품이 하나 놓여 있다.
델포이에 아폴론 신전이 세워지고,

옴파로스(배꼽, 중심)라는 돌이 놓여지고,

신전 주위 여러 곳에 복사품을 놓은 모양이었다.
아폴론 신전에 있던 옴파로스는 현재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요즘 들어 그 옴파로스는 무희의 기둥에 올려져 있던 것이라고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배꼽)이라고 생각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각각 동쪽과 서쪽에 놓아주면서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게 했더니

그 두 마리가 델포이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수리 두 마리가 만난 곳 주위에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베오티아(보이오티아)의 보고

그리스 중부의 고대 도시 베오티아(보이오티아)의 보물창고 자리이다.

옴파로스 자리 바로 왼쪽에 위치.

왼쪽으로 건너편은 테베의 보고 자리




아테네의 보고

유적에 남아있던 자재로 복원한 것...

벽에 아폴론 찬가의 악보가 새겨져 있었단다.


아테네의 보고


아폴론 성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기념물은 아테네의 보고이다.

파로스 섬의 흰 대리석으로 지었으며,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아폴론 피티오스에 바쳐졌다.

peisistrati 폭정 붕괴(BC 510년) 에 따른 아테네의 민주주의 확립,

혹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BC 490년)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신전 형식의 구조물은

파사드 벽기둥 사이에 두 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세운 형태.

이 보고는 처음에는 아테네 시당국에 의해 1903-1906년에 복원,

두 번째 복원은 정부의 문화관광 부서의 착수로

2004년에 마쳐졌다.

가운데 위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로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운데 아래의 부조는 아폴론에게 바친 노래 파이안 악보.

오른쪽은 남쪽 벽 삼각 연단 앞으로

마라톤 전투의 승리 전리품을 놓은 모습.

2, 3세기에는 비문 연구에 따른 델피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아테네의 보고


아테네의 보고와 대리석 길


델피 평의회관


시빌의 바위(The Rock do Sibyl)

텔포이 최초의 여사제였던 시빌이 신탁을 내린 곳이라 하여

시빌의 바위로 불린다.

파에드리아데에로부터 떨어진 바위.

지역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델피의 첫번째 여사제인 시빌 히에로필레가

이곳에 서서 신탁(계시)을 전했다고 한다.

실제로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했다고 한다.

시빌의 바위 유적지는 델피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장소로 여겨진다.

오래된 대지의 성역은 이 구역과 성스러운 샘 주변이다.


시빌의 바위 뒤로 보이는 기둥이 낙소스 스핑크스 자리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낙소스 스핑크스

12m 높이의 이오니아식 기둥에 올려져 있는 거대한 낙소스의 스핑크스.

BC 6세기 중반.

이것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것.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이 있는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 여인의 머리를 가진

동양에서 유래한 상상의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전통과 원시 숭배와 연관되어 있고,

무덤이나 성역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The HALOS

이곳은 종교적으로 특별히 중요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8년마다 아폴론이 뱀 피토를 죽이는 장면을 재현했다.

할로스의 뒤편에는 돌로네이아라는 계단이 있고,

아폴론을 대역한 소년이 이용했다.

고대에는 할로스 주위에 네 개의 반원형 건물이 있었고,

오늘날 두 개가 보존되고 있다.

1939년에 이 구역과 포장된 성스러운 길 아래 구덩이에서

BC 548년의 지진으로 무너졌던 아주 소중한 유물들이

보호된채로 발견되었다.

금과 상아로 장식된 상, 미니어처들, 조각난 은황소상, 그 외...

이런 것들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The HALOS 주변의 반원형 건물터


The HALOS 주변

1939년에 이 구역과 포장된 성스러운 길 아래 구덩이에서

BC 548년의 지진으로 무너졌던 아주 소중한 유물들 발견.

금과 상아로 장식된 상, 미니어처들, 조각난 은황소상, 그 외...

현재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The HALOS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들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


아테네인의 스토아

아테네인의 스토아는 아테네의 해상 승리를 기념하여 지어졌다.

길이 30m,  정면 파사드에 목재 지붕을 받치는 7개의 거석 대리석 기둥,

주랑 뒤에는 아폴론 신전의 다변형 벽이 있다.

이것은 BC 510-470년 동안에 지어졌다.

열주의 토대에 그것을 증명하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귀는 아테네인의 스토아를 헌정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를 무찌른 후에 배와 뱃머리상을 신에게로 이어주는 밧줄을...

아테네의 중요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적 자금을 썼고

페르시아전 승리의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을 기념한 것 같다.



아테네인의 스토아 열주 토대에 새겨진 글자들



아테네인의 스토아 열주 토대에 새겨진 큰 글자들과 앞 비석의 작은 글자들


아테네인의 스토아를 지나며...


이오니아식 기둥

델포이 신탁 시절에는 이 주위로 코린트의 보고와 아칸타의 보고가 있었을 것이다.


아폴론 신전 바깥을 둘러싼 다변형 벽에 새겨진 글자들...


아폴론 신전 바깥을 둘러싼 다변형 벽에 새겨진 글자들...


아폴론 신전 바깥을 둘러싼 다변형 벽에 새겨진 글자들...


아테네인의 스토아를 지나 아폴론 신전으로 향한다.

왼쪽 끝쯤에 키오스 섬의 제단,

오른쪽으로 청둥 뱀기둥 자리...

오래 전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르다 보면

각종 조각상과 청동 뱀기둥 등이 우뚝우뚝 솟아 더 신성함이 느껴지고

거대한 파르나소스 산의 위용과 함께 상당한 위압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아폴론 신전을 둘러싼 벽의 돌들은 자연석 모양을 잘 살려 쌓은 것이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잘 견디도록 한 것이란다.

BC 6세기에 쌓은 것이라는데, 아직도 건재하니 놀랍다.

오른쪽은 키오스 섬의 제단 일부



청동 뱀기둥(모조품. 진품은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에... 아래 사진)

키오스 섬의 제단 맞은 편에 위치.

기원전 479년 아테네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을 기념한 조형물로,

7.5m 높이에 위에는 금으로 된 삼각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황금 가마솥 모양의 의자가 놓여 있었단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D 330년에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비잔티움에 세운 도시이니

새로운 로마(동로마)의 수도를 장식하고자 했음이리라...


터키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 청동 뱀기둥(Serpent column)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왔다는 뱀기둥.

뱀 머리는 없어지고 기둥만...

 뱀 세 마리가 몸을 서로 꼬인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원래 이 뱀들이 지름 3m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었단다.

지금은 윗부분이 깨어져서 머리가 없는 상태인데 그 머리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다른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행방불명이란다.

뒷쪽에 보이는 왼쪽 기둥이 오벨리스크, 오른쪽 첨탑이 블루 모스크  여섯 첨탑 중 하나.

(2010.8.1. 터키 방문 시 찍은 사진)


아폴론 신전 앞 조형물들

사진 왼쪽부터 키오스 섬의 제단, 태양신의 금박마차상,

레타에안의 세발솥의자(청동 뱀기둥), 아에밀리우스 상 등...




왼쪽은 아폴론 제단 표시,

오른쪽 처음에 나오는 글씨는 고대 그리스어 '델피'...


아폴론(아폴로) 신전이 세워진 이야기

신화에 의하면

아폴론이 피톤을 죽이고 자신의 성소를 만든 후부터

이곳이 아폴론을 숭배하는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피톤(Python)은 파르나소스 산 남쪽 기슭에 있는

델포이(당시 피토)의 신탁소를 지배하던 큰 뱀이다.

피톤의 모습은 거대했고, 까만 독사의 모습이었다.

피톤은 어머니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대홍수 이후에 진흙에서 기어나왔다고 한다.

가이아는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성지 피토를 피톤에게 이양해주며

그가 사람들에게 예언을 내릴 것을 허락했단다.

피톤은 평소에는 피토 근처 깊은 대지의 틈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신관들의 기도나 많은 공물에 응답하여 땅속에서 기어나와 신탁을 내렸으며,

가이아의 의사에 반하는 예언은 하지 않았단다.

피톤은 어머니 가이아로부터 하나의 예언을 받았는데,

다음에 태어나는 제우스의 아들이 피톤의 생명을 빼앗을 거라는 거였다.

피톤은 여신 레토가 제우스의 자식을 잉태한 것을 알고,

자식을 잉태한 레토를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레토는 다른 신들의 도움을 받아

쌍둥이 오누이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출산하게 된다.

아버지인 제우스는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

아폴론은 갓 태어났지만 제우스가 바라는 바를 알아차렸고

피톤으로부터 신탁소를 빼앗기 위해 활과 화살을 가지고 피토(델포이)로 향했다.

방금 태어난 듯한 갓난아기의 모습을 한 아폴론을 본 피톤은

먼저 덮치지 않고 한 입에 먹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폴론은 피톤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몸을 관통 당한 피톤은 저항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피톤의 시체는 아폴론의 손에 의해 껍질이 벗겨지고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돌로 된 관에 넣어져 신탁소 안쪽의 옴파로스 밑에 묻혔다.

피톤을 죽인 자리에는 자신의 성소를 세우고

이곳의 지명을 대지의 자궁을 뜻하는 델포이로 바꾸었다.

아폴론은 자신이 이 신탁소의 지배자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피톤을 죽인 일로 가이아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피톤의 죽음을 애도하는 피티아 제전을 열어

가이아와 피톤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기를 열었다고 한다.


아폴론(아폴로) 신전(BC 4세기의 모습 복원도)

위 오른쪽은 아폴론 신전의 용마루에 조상(彫像)되었던 아크로테리온(acroterion)


음악과 화합과 빛의 신인 아폴론을 모신 신전은

델피 성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곳.

처음 건설된 것은 BC 7세기 하반기,

두 번째 건축물은 BC 514-506년에 건축되었다.

좁은쪽으로 6개, 긴쪽으로 15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두었는데,

파로스 섬의 대리석을 사용한 파사드를 제외하고는

다공성 돌을 사용했다.

아테네의 조각가 안테노르(Antenor)에 의해

페디먼트 조각이 꾸며졌고,

아케익( 아르카이크, Archaic) 시대의 동쪽 페디먼트에는

4두마차를 타고 델피에 온 아폴론을 묘사했다.

서쪽 페디먼트에는 신들과 거인(기가스)의 전쟁 장면을 묘사했다.

BC 373년 강한 지진으로 파괴.

오늘날 보이는 건축물은  BC 330년에 건축되었는데,

코린트의 건축가 스핀타로스(spintharos)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 역시 도리아식 주랑으로 되어 있었다.

지붕과 페디먼트 장식은 파로스 섬의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아테네의 미술가인 프락시아스(Praxias)와 안드로스테네스(Androsthenes)가 완성했다.

BC 4세기에 신전의 동쪽 페디먼트에는

아폴론과 어머니 레토, 여형제 아르테미스, 뮤즈의 모습을 묘사했다.

서쪽 페디먼트에는 

디오니소스가 그의 여성 신봉자들 사이에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득한 아테네인의 전리품인 페르시안 방패가

신전의 메토프에 붙어 있었다.

BC 279년 갈리아의 침략을 물리친 후 획득한 전리품인 갈릭 방패와 함께...

신전의 입구에는 고대의 작가들인 일곱 현인(Seven Sages)의

'너 자신을 알라', '지나치지 않게'와 같은 유명한 격언들이 쓰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가사의한 델피의 심볼인 'E'도...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아폴론 신전 앞에 쓰여 있는 격언...

이 격언은 몇 명의 그리스의 현자 중 한 사람이 말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사람들은 킬론,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솔론, 탈레스, 시인 페모노에 등...



소크라테스의 신탁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신탁을 들으려고 이곳에 왔다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들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현자로 이름난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찾아다녔고,

결국 신만이 진정한 지자이며

인간의 지혜는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이 결국 자신의 주변에 적을 많이 만들게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된 셈이다.


아폴론 신전 정면의 모습


옴파로스

옴파로스는 대지의 중심(배꼽)을 상징했으므로

 아폴론 신전 지하의 비밀 성소(피티아가 신탁을 전하는 곳)에 놓여 있었다.

델포이 성역 여기저기에도 대지의 중심임을 알리기 위해

옴파로스의 복제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보고 아래에 놓인 것도 그 중의 하나일 터...


신탁 절차

피티아와 사제, 신탁 신청자들은 신전 근처의 카스탈리아의 샘에서 몸을 씻고,

아폴론 신전의 지하 성단(아디톤)으로 내려간다.

이어 사제가 신탁 신청자의 질문을 전한다.

피티아가 신성한 세발의자에 앉아 월계수잎을 흔들고

바닥 틈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마셔

신성 도취 상태에서 신의 게시를 말로 전한다.

피티아의 말을 들은 사제들이 피티아의 말을 정리하여

신청자들에게 신탁을 전달한다. 


청동 뱀기둥과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 주변의 장식 조형물들


왼쪽부터 말밥굽 모양의 기념물에서 나온 델피 철학자상,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친구인 다오코스의 기념물의 가족상,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세 명의 무희 기둥.

무희의 기둥은 11m 높이에 아칸서스 잎이 조각되어 있고,

기둥 위에 세 명의 무희 상이 있으며,

이들이 옴파로스를 왕관처럼 이고 있는 형상.

(모두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물들

왼쪽이 델피 철학자상, 다오코스의 기념물의 가족상,

오른쪽이 세 명의 무희 기둥.


더 위로 올라가서 바라본 아폴론 신전

오늘날 보이는 건물은 BC 330년에 건축되었다니

지금으로부터 2,350년 전의 모습~~~

지금 보아도 웅장함이 느껴지는 규모이다.


아폴론 신전의 동쪽 출입구 부분에 있던 후실(後室) 바닥의 모습

저기 어딘가쯤에 신탁소가 있었을 것인데,

유적 보호상 올라가 볼 수는 없겠네...


아폴론 신전의 전체 모습

BC 330년에 만들어진 현재의 유적은 원래

정면과 후면에 6개씩, 측면 가운데에 13개씩,

총 38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단다.

신전 내부는 3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며,

가장 안쪽의 신탁소는 2층 구조였단다.

그 중 1층 중앙에는 황금 아폴론상이 놓여 있었고,

지하 밀실에는 옴파로스가 놓여 있었으며,

피티아가 옴파로스 앞의 세발 의자 위 청동 가마솥에 앉아

신탁을 행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더 위로 오르면 야외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피티아가 세발솥 모양 의자에 앉아서 신탁을 행하는 모습

440년경 신탁의 모습이다.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야외 극장 앞에서 가이드님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아폴론 신전 복원도
델포이 성역의 주 성전인 아폴론 신전 복원도이다.

38개의 웅장한 도리아식 기둥이 받들던 신전의 위용!

지금은 그 중 6개 기둥의 일부분만이 남아있다.

아폴론 신전의 용마루에 설치되었던 아크로테리온(acroterion)은
상의로 히마티온(himation)을 걸쳤고

상체의 양 날개는 없어졌다.

특이한 점으로는 다리에 날개가 달린 점...

승리의 여신인 니케를 상징하는 여신 조각 중

하체에 날개가 달린 특이한 형태이다.

BC 515-505년 작품으로 추정된단다.

이 아크로테리온은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델피 고고학박물관의 아폴론 신전 아크로테리온

상체의 양 날개도 없고,

왼발과 오른쪽 다리 아래 부분은 멸실되었다.

다리에 날개가 달려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대 델포이 야외 극장

델포이 성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고학적 유적.

아폴론 성역의 지성과 문화의 전성기를 말해준다.

플레이스토스 강 계곡이 보이는 멋진 뷰를 가졌으며

원형극장 형태로 지어졌다.

델포이 야외 극장은 피티아 제전 때 음악과 연극 경연장으로

또는 다른 종교적인 축제장으로 이용되었다.

최초의 건물 형태는 알려지지 않는다.

아마 관중들은 나무 의자나 지면에 앉았지 않았을까...

BC 4세기에 처음으로 돌로 된 극장이 지어졌고,

BC 160/159년 시기에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의 기금으로 복원.

현재의 형태는 로마 시대(AD 1세기)에 건축되었다.

파르나소스 산 현지 돌을 사용해서 건축.

코일론(Koilon)이라 불리는 관객석은 5,000명 수용 규모.

통로인 디아조마(Diazoma)를 경계로 2개의 구역으로 나눠지며,

모두 35줄로 되어 있다.

가운데 둥근 바닥은 오케스트라 석이고,

그 앞쪽(관람석 반대편)에 양쪽 측면의 파라스케니아가 있는

스케네(스테이지)를 세웠다.

오늘날은 기초만 남아 있다.

프로스케니움으로 불리는 파사드에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부조 띠가 있었는데,

지금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 띠 장식은 아마도 로마의 네로 황제가 델피를 방문한 시기인 AD 67년에

복구 작업을 할 때 더해진 것 같다.

슬라브 노예해방에 대한 비문이

극장 벽 일부에 새겨져 있다.

1927년 델피 축제 때 이 극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 공연이 열렸는데,

현대 그리스 역사상 고대 극장이 재사용되고

고대 그리스 연극이 부활된 것으로 처음이었다.

그리스의 시인 Angelos Sikelianos와 그의 미국인 부인 Eva Palmer 덕분이었다.

사진 위쪽 장면은 1930년의  프로메테우스 공연 모습.


고대 델포이 야외 극장(좌)


델포이 야외 극장(중)

BC 4세기에 처음으로 돌로 된 극장이 지어졌다고 하며,

피티아 제전에서 음악과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던 곳...

35줄, 5,000석 규모



델포이 야외 극장(우)


피티아 제전이 열렸던 델포이 야외 극장


야외 극장 더 위로 조금 떨어진 곳에 델포이 스타디움이 있다.



델포이 스타디온(스타디움)

피티아 제전의 육상 등이 이루어진 경기장.

피티아 제전은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처음에는 시와 음악 경연이 중심이 되었으며(야외 원형극장에서)

육상, 마차 경주 등이 추가되고  4년마다 열렸다.

BC 582년부터 AD 424년까지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델포이 스타디움도 올림피아 스타디움처럼 출발선이 표시되어 있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어 있었는데,

2세기경에 그리스의 대부호 헤로데스 아티쿠스

자비로 발굴하고 재건축했다.

관람석과 동쪽의 아치형 출입문도 설치했다.


아폴론 신전

지금은 비록 널브러진 돌들의 무덤같아 보이지만

한 때 가장 강력한 신탁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복원된 아테네의 보고가 보이는 모습




왼쪽이 여사제 피티아가 앉았던 세발솥의자 받침대로 짐작되는 석판,

혹은 아디톤 성소의 바닥 석재로 추정되는 석판이란다.




크라테로스(알렉산드로스 3세를 보좌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의 공물 자리





아폴론 신전의 동쪽 출입구 부분에 있던 전실(前室)의 바닥 모습.


델포이 고대 유적지를 떠나는 아쉬움에 자꾸만 찰칵찰칵~ 


아폴론 신전 입구

유적 보호를 위해 신전은 출입금지!




구멍난 이 석재는 또 무엇일꼬?

올라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 또 찰칵!


내려가는 길에 대지의 배꼽인 옴파로스를 다시 대한다.

비록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그 옛날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세상의 중심에 선 기념으로

앞날에의 무탈함을 빌어보면서......

(2019.1.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