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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2 - 유엔군 초전기념관 내부 전시 관람

죽미령 평화공원 - 유엔군 초전기념관 (2022.04.14.목) (2022.07.29.금)


 

유엔군 초전기념관

초전~ 첫 전투...

유엔군이 북한군에 맞서 처음 전투(죽미령 전투)를 벌인 이곳 죽미령 고개에 건립.

2013년 4월 23일 개관.

 

* 관람: 화~일요일 09:00 ~ 18:00 (입장마감 17:00)

* 휴관: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ㆍ추석 당일
   ※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다음날 휴관

* 관람료: 무료

밖에 있는 안내 설명을 먼저 보고...
내부 전시관으로 들어간다. 2층에 상설전시실이 있다.
건립 안내 설명도 만나고...

 

 

[상설전시실]

유엔군 초전기념관 상설전시 안내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홈페이지 자료)

 

 

1. 그들을 만나러 가다

기억의 시작. 영상자료를 만난다.
죽미령 전투 참전 용사들을 만난다.
유엔군 참전 용사들
죽미령 전투 참전 용사들

기억의 시작~

당시의 참전 용사들이 잊을 수 없는 기억, 옛일을 회상한다.

 

 

2.  6ㆍ25전쟁과 유엔군

유엔군 참전의 교훈.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런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유엔의 의지가 담겼다.
한국전쟁 참전국들, 의료지원국들. 클릭하면 자료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1950년 6월 첫 참전부터 1953년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의 유엔군 참전일지도 있고...
당시의 한반도 정세, 전쟁의 아픔과 피해 상황 등~
6.25전쟁 당시 19세였던 김종태님의 자필 일기

 

 

 

3.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참전 과정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 1950년 6월 26일 09:00 미국 정부,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으로 조사단 파견 명령

- 1950년 6월 27일 맥아더 장군, 조사반을 수원에 파견 / 08:00 미 정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대한 작전 지휘권 부여

- 1950년 6월 28일 수도 서울 함락(북한군이 3일만에 서울 점령)

- 1950년 6월 29일 06:10 맥아더 장군 수원비행장 도착 및 시찰 / 18:15 일본으로 돌아가서 지상군의 파견 건의

- 1950년 6월 30일 22:30 미 백악관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휘하의 병력 사용 전권 부여 및 지상군 투입 승인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 일부(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선에 투입

- 1950년 7월 1일 15:00 스미스 부대 부산 도착 / 20:00 기차로 대전행

- 1950년 7월 2일 08:00 대전역 도착

-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도착 및 유엔군 첫 전투(죽미령 전투)

스미스 부대원들의 험난한 여정도

* 한국전쟁 파견 무렵 당시의 일들과 파견 과정

 

일본의 캠프 우드에 머무르고 있던 스미스 부대원들은 언어 소통 문제로 전쟁에 대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먼 곳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강행한 후 캠프 우드에 적색경보가 발령되었다.

 

처음 이타즈케 공군기지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수송기에 올랐으나

비행 도중 부산의 활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저녁 8시에 이타즈케 공항으로 돌아왔고,

이후 부산의 활주로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2시간 가량 대기했다는 병사의 회고록...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4대의 C-54 수송기에 탑승하여  7월 1일에 부산 도착,

이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일본 캠프 우드에서의 생활상도 보여주네...
제24사단 제21연대
일본 캠프 우드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더글러스 C-54 스카이마스터(Douglas C-54 Skymaster) 수송기
부산에서... 그리고 전쟁 참여

 

* 유엔군 첫 전투의 시작,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유엔군 초전). 1950년 7월 5일 08:16 전투 개시~14:30 철수 결정 및 전투 종료시까지 6시간 15분의 전투
죽미령 전투 과정 전체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07:00 북한군 전차(T-34) 8대 남진 발견. 08:16, 전방 1.8km 접근 시 포병 105mm 곡사포 사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이어짐
14:30, 철수 결정으로 전투 종료될 때까지의 과정
북한군 T-34 전차. 1940~58년 생산된 소련의 중전차. 남침 당시 242대 동원해서 쳐내려옴.
죽미령 전투 당시에는 북한군의 T-34 전차의 위력을 당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군사력이 월등히 높았다.

일본 규슈 캠프 우드에 머물고 있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라는 명령에 따라 한국으로 오게 된다.

부산~대전~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하였고

1950년 7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남진하는 북한군을 제지하고자 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소탕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포병과의 연락도 두절되고 소총탄도 다 떨어져가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철수하게 된다.

 

 

 

4. 죽미령 전투(영상 코너)

6시간 15분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영상 코너인데,

영상을 보기만 하고 동영상은 안 찍었네.

사진만 몇 장~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 영상 중에서...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 영상 중에서...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 영상 중에서...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 영상 중에서... 한국전쟁 참전국들 국기~

 

 

 

5.  그 후, 지금의 우리

유엔군 병사들
유엔군 젊은 병사들이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먼 이국 땅을 밟았다.
한국인과 담소를 나누는 유엔군(1950) , 유엔군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1951) 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한국전선 방문(1952), 휴전 협정에 서명(1953)
1950년 전사한 워커 중장(미 8군사령관) 추도식도 있었네.(1951)
전 대통령들이 참전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모습(1953, 1975)
오산시장이 스미스 부대원들에게 감사패 전달(2012)
유엔군 초전기념비 건립(1955), 신 초전기념비 건립(1982)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에서 열린 행사 모습
한국전쟁 참전 지휘관들

죽미령전투는 한국전쟁 때 유엔군 초전 전투이며,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는 된 계기가 되었다(유엔 창설 이후 첫 참전).

 

 

 

6.  스미스 부대 540명 명판

스미스 부대 540명 명판
스미스특수부대 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추모 공간 (2022.04.14.)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지휘관 찰스 B.스미스 외~
연락 장교 윤승국 외~
스미스 특수부대원들이 시용했던 군복, 인식표(이름표), 철모, 전투화
"이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2.07.29.)
스미스 부대 540명 명판

 

 

 

7. 스미스 부대원 기증 유물

밀러 O. 페리 장군 동상. 페리장군의 딸 Susan M. Perry씨가 페리 장군이 100세 되던 해 미군 측에서 수여한 청동동상을 기증
스미스 부대원 사진
구 초전기념비의 기단부에 있던 동판. 1963년 도난당함, 1977년 하와이의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발견, 1978년 한국으로. 2014년 오산시에 전달됨.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기단부에 있던 동판. 도난당했던 것을 찾게 되어 이곳에 전시 중이다.

 

 

 

8. 스미스 부대로부터 온 편지(영상 코너)

스미스 특수부대원들이 전하는 기억 영상

일본 캠프 우드에서 만나 친구가 된 폴(Paul)과 요셉(Joseph). 죽미령 전투 중 사망한 폴에게 보내는 요셉의 편지가 가슴 먹먹하게 한다.

 

 

 

9. 잊지 못할 그들에게

이름도 모르던 먼 나라~ 타국의 평화를 위해 참전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국가별 참전자가 표시된 세계지도
한국전쟁 당시 사용했던 집기들, 컵과 철제 숟가락은 북한국 혹은 중공군이 사용한 거란다.
허리띠도 보이고...
KOREA에는 찰스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1916~ 2004)가 파견된 것을 나타내었네.
잊지 못할 그들에게 메시지 전하는 코너
죽미령 전투에 참가했던 용사들, 연락장교 윤승국, 백선엽 장군, 안미석 의원, 김창준 전 미국국회의원 등의 메시지가 있었다.

 

[죽미령 전투]

6시간 15분간의 전투, 죽미령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 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가 모습을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 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홈페이지 자료)

 

 

우리 민족의 비극 6ㆍ25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3일 만에 함락되자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 지상군 투입을 건의하고

미 백악관은 맥아더 장군에게 휘하의 병력 사용 전권을 부여하고

지상군 투입을 승인한다.

이어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 일부(스미스 부대)를 한국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그들이 처음으로 참전한 곳이 바로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다.

전차부대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적은 시간이나마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어 남한의 다른 전선을 구축하는데 힘이 되었다.

이 전투는 유엔 창설 이후 유엔군의 첫 참전을 세계에 알렸으며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2022.04.14.목 / 2022.07.29.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