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 초전기념관
초전~ 첫 전투...
유엔군이 북한군에 맞서 처음 전투(죽미령 전투)를 벌인 이곳 죽미령 고개에 건립.
2013년 4월 23일 개관.
* 관람: 화~일요일 09:00 ~ 18:00 (입장마감 17:00)
* 휴관: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ㆍ추석 당일
※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다음날 휴관
* 관람료: 무료
[상설전시실]
1. 그들을 만나러 가다
기억의 시작~
당시의 참전 용사들이 잊을 수 없는 기억, 옛일을 회상한다.
2. 6ㆍ25전쟁과 유엔군
3.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참전 과정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 1950년 6월 26일 09:00 미국 정부,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으로 조사단 파견 명령
- 1950년 6월 27일 맥아더 장군, 조사반을 수원에 파견 / 08:00 미 정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대한 작전 지휘권 부여
- 1950년 6월 28일 수도 서울 함락(북한군이 3일만에 서울 점령)
- 1950년 6월 29일 06:10 맥아더 장군 수원비행장 도착 및 시찰 / 18:15 일본으로 돌아가서 지상군의 파견 건의
- 1950년 6월 30일 22:30 미 백악관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휘하의 병력 사용 전권 부여 및 지상군 투입 승인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 일부(스미스 부대)를 한국전선에 투입
- 1950년 7월 1일 15:00 스미스 부대 부산 도착 / 20:00 기차로 대전행
- 1950년 7월 2일 08:00 대전역 도착
-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도착 및 유엔군 첫 전투(죽미령 전투)
* 한국전쟁 파견 무렵 당시의 일들과 파견 과정
일본의 캠프 우드에 머무르고 있던 스미스 부대원들은 언어 소통 문제로 전쟁에 대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먼 곳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강행한 후 캠프 우드에 적색경보가 발령되었다.
처음 이타즈케 공군기지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수송기에 올랐으나
비행 도중 부산의 활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저녁 8시에 이타즈케 공항으로 돌아왔고,
이후 부산의 활주로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2시간 가량 대기했다는 병사의 회고록...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4대의 C-54 수송기에 탑승하여 7월 1일에 부산 도착,
이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 유엔군 첫 전투의 시작, 죽미령 전투
일본 규슈 캠프 우드에 머물고 있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라는 명령에 따라 한국으로 오게 된다.
부산~대전~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하였고
1950년 7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남진하는 북한군을 제지하고자 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소탕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포병과의 연락도 두절되고 소총탄도 다 떨어져가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철수하게 된다.
4. 죽미령 전투(영상 코너)
6시간 15분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영상 코너인데,
영상을 보기만 하고 동영상은 안 찍었네.
사진만 몇 장~
5. 그 후, 지금의 우리
6. 스미스 부대 540명 명판
7. 스미스 부대원 기증 유물
8. 스미스 부대로부터 온 편지(영상 코너)
9. 잊지 못할 그들에게
[죽미령 전투]
6시간 15분간의 전투, 죽미령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 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가 모습을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 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홈페이지 자료)
우리 민족의 비극 6ㆍ25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3일 만에 함락되자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 지상군 투입을 건의하고
미 백악관은 맥아더 장군에게 휘하의 병력 사용 전권을 부여하고
지상군 투입을 승인한다.
이어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 일부(스미스 부대)를 한국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그들이 처음으로 참전한 곳이 바로 유엔군 초전 죽미령 전투다.
전차부대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적은 시간이나마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어 남한의 다른 전선을 구축하는데 힘이 되었다.
이 전투는 유엔 창설 이후 유엔군의 첫 참전을 세계에 알렸으며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2022.04.14.목 / 2022.07.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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