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상주] 도남서원 / 낙강범월시

도남서원 (2022.10.17.월)


 

상주보를 거쳐 다다른 곳은 도남서원.

정몽주, 이황 등 아홉 분을 모신 서원이다.

상주보에서 낙동강 따라 올라가다가

경천섬 주차장 못 미처에 위치하고 있다.

 

 

도남서원(道南書院)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창건하여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 되었으며

1797년(정조 21)에 동·서재를 세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다.

18071년(고종 8)에 훼철(毁撤)된 후

1992년 향토 유림에서 강당 등 일부를 건립한데 이어

경상북도의 지원으로 동·서재를 복원하였고

2002년부터 유교문화 관광개발 사업으로

정허루·장판각·전사청·영귀문·고직사·일관당·입덕문 등을 건립하였다.

영남의 으뜸 서원으로 추로지향의 위상을 수 백년간 이어오면서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이준 등

아홉 선생을 모시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2·8월 하정일이다.

(안내 설명문에서...)

도남서원

도남서원의 도남은 '도남(道南)'은 정자(程子)가 제자 양시(楊時)를 고향으로 보낼 때

'내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吾道南矣)' 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도남서원'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단다.

 

도남서원 정문인 입덕문

향사가 있을 때 외에는 닫혀 있는 모양이다.

이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따라 왼편으로 돌아가서

작은 문(영귀문)으로 입장할 수 있다.

 

도남서원에 대한 안내 설명
도남서원 왼쪽에 휴게소 역할을 하는 낙강마실이 있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서원을 돌아본 후 나갈 때 잘 닫고 가라는 안내가 있다.
영귀문 안으로 도남서원 이모저모. 왼쪽부터 관리사(사행당), 정허루, 입덕문. 뒤로 일관당과 동서재, 더 뒤로 도정사와 전사청이 있다.
사행당과 정허루, 사이 뒤로 일관당

 

사행당(四行堂)

고직사(관리사)로 쓰이고 있는 건물.

도남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란다.

관리사인 사행당
사행당기 편액이 걸려 있다.
툇마루에 놓인 서원 관리인의 말씀

박쥐똥이 다소 혐오와 불쾌감을 줄 수 있으나

예로부터 박쥐는 신성하고 영험한 동물로 알려져 전통문양에도 쓰이던 캐릭터.

친황경에서 서식하는 박쥐가  점점 살 곳을 잃는다는 내용.

도남서원에도 몇 종류가 서식하니

방문객 여러분이 참고하시어 관람하기 바란다는 말씀...

 

 

정허루(靜虛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002년부터 유교문화 관광개발 사업으로  건립하게 된다.

2003년 준공된 누각이다.

정허루
덧신을 신고 올라갈 수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계단은 일관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정허루중수기가 걸려 있다. 2002년 중건 결정, 2003년 6월 25일 준공
정허루에서.... 바로 앞은 입덕문, 오른쪽은 영귀문과 낙강마실. 주차장 오른쪽 끝 트럭 뒤로 낙강범월시유래비. 오른쪽 끝 가운대로 상주보
정허루에서 낙동강 경천섬과 산 중턱의 학전망대를 바라본다..
정허루에서 뒤편의 일관당(도남서원 현판)과 동재도 바라본다..

 

 

일관당(도남서원 현판)과 동서재(손학재와 민구재)

강학 공간(강당)인 일관당에는 도남서원 편액이 걸려 있고,

좌우로 의재, 경재로 표시된 온돌방이 있다.

일관당 좌우로는 왼쪽에 서재(민구재), 오른쪽에 동재(손학재)가 있다.

기숙사로 이용되던 건물.

왼쪽부터 민구재, 일관당, 손학재

 

 

도정사(道正祠)와 전사청

도정사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 이준

이 아홉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전사청은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구, 제물과 각종 기구 보관, 제수의 진찬을 준비하는 건물이다.

이 지역은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모양.

도정사와 출입문.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어서 담 너머로~
도정사와 출입문
전사청과 출입문
전사청 앞 끝에서 내려다본 모습. 일관당, 정허루, 민구재와 장판각, 낙동강까지~
민구재로 내려와서...(민구재 바로 옆은 장판각), 가운데 뒤 위로 전사청, 오른쪽 살짝 보이는 건물은 일관당.
주차장에서 바라본 도남서원 전경
도남서원 주차장에서 바라본 범월교, 경천섬, 낙강교, 학전망대
상주는 옛날부터 경상도의 한 축이었다. 상주에 많은 서원이 있음을 알겠네.

 

 

낙강범월시유래비

도남서원 앞 주차장 한쪽 끝에 낙강범월시유래비가 있다.

상주의 옛 선비들이 낙동강에 달 띄우고 뱃놀이하며 대를 이어 지은 시에 대한 설명이다.

낙강범월시유래비 뒤에 새겨진 글을 아래에 옮겨 본다.

낙강범월시유래비
낙강범월시유래비 뒷면

낙강범월시란 상주의 옛 선비들이 낙동강에 달 띄우고 뱃놀이하며 대를 이어 지은 시로

시회(詩會)와 시집(詩集)을 아우른 말이다.

 

이 시회는 백운 이규보가 1196년 낙동강사를 남긴 뒤로

700여 년을 이어온 낙강시회 중에서도

특정의 171년간 8회의 시회마다 창작된 시 6130여권을 남겼으니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1607년 첫 시회부터 정조 2년인 1778년까지 171년 동안 8차례 개최된 '낙강범월시회'다.

 

1622년 임술 7월 16일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낙강에서 재현하자

발의함에 조정(趙靖), 이준(李埈), 강응철(康應哲), 전식(全湜), 김헌(金憲), 김지복(金知復),

김정헌(金廷獻), 류진(柳袗), 조우신(趙又新) 등 선현 30인이 

동의하여 모임으로써 시회는 비롯되었다.

매회마다 선비들은 도남서원을 열림과 닫힘의 구심점으로 삼아 

상산(商山) 낙강(洛江) 상하의 명승지를 선유하며

강과 달과 사람이 하나된 선경 속의 자신들을 시로 담아 서원(書院)에다 갈무리하였으니

이 또한 창석(蒼石)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낙동강은 상락(上洛)의 동쪽에서 이름을 얻었기에 상주강으로

퇴강(退江)에서 관수루(觀水樓)까지 천혜의 낙강 제1경(洛江第一景)을 짓고

사벌국(沙伐國) 이래로 영남의 젖줄이 되어 왔다.

게다가 낙강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된 낙서(洛書) 출현의 낙수와 연상되어 

유도(儒道)의 맥이 흐르는 강이란 상징성으로 인하여

상주의 선비들이 1606년 강변 무임포(無任浦)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워 

조선의 도학(道學) 정통은 영남에 있고 

영남의 도학 정통은 상주가 잇는다는 사명감으로 

묘호를 도정사(道正祠)라 하였던 것이다.

 

강은 사람을 만나 이름을 얻고 사람은 강을 만나 도맥(道脈)을 얻은 영지(靈地)에서

도남서원과 낙강범일시를 탄생시킨 선배들의 도학자적(道學者的) 시풍(詩風)을 이은 후배들이

근 200년 동안이나 시간을 초월하여 미증유의 낙강시단(洛江詩壇)을 형성하고

낙강동인시집(洛江同人詩集)을 창출하였다.

이는 적벽부(赤壁賦)를 넘어 조선의 낙강문학(洛江文學)의 한 유형을 창조한 것이다.

상주 특유의 문화유산이라 대서특필(大書特筆)할 만하다.

 

고귀한 문화유산을 전승함은 오늘의 몫이라

도남서원(道南書院, 院長 李秉睦)에서 유래비를 세워

무임포(無任浦)에 호수가 생기듯 낙강도남문학단(洛江道南文壇)에도

제2 제3의 낙강범월시가 거듭나기를 비는 표상(表象)을 삼고자 함에

서원의 뜻을 받든 이창구(李彰九) 도감(都監)과 금우현(琴宇絃) 자문위원이

나를 낙강범월시 연구자라 하여 비문을 청하매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 같이 밝힌다.

 

 

檀紀四三四五年 (西紀 二○一二年) 十月 八日

慶北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권태을(權泰乙)  謹識

前 副總理  兼  經濟企劃院  長官  前  道南書院  院長  經濟學博士  조순(趙淳)  前文書

大邱韓醫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김영숙(金榮淑)  本文書

 

(낙강범월시비 뒤편의 글 옮김)

 

 

1196년(고려 명종 26) 이규보가 낙동강사를 남긴 뒤로 700년 정도 이어온 낙강시회 중에서도

1607년(조선 선조 40) 첫 시회부터 1778년(정조 2)까지 171년 동안 8차례 개최된 낙강범월시회 이야기,

낙강범월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네.

(2022.11.1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