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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성주]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2022.11.18.금)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을 말한다.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 정상에 위치.

* 태실: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둔 곳.


 

성주읍에서 이동하여 세종대왕자 태실을 방문하게 된다.

몇 번 방문한 곳이지만 주변을 가게 되면 들르곤 한다.

 

인촌저수지. 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선석산의 맥이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서 있고, 이곳 인촌저수지가 물주작 형상을 하고 있단다.
인촌저수지를 지나 세종대왕자 태실 오름길 입구에 다다른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설명. 갈 때마다 읽어 보게 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을 잠시(150m) 오른다.
세종의 자녀 19명 중 18명(장남인 문종 제외)과 원손 단종의 태. 한쪽으로 정비 소생의 대군들 출생순으로, 다른쪽은 후궁 소생의 군들 출생순으로 배치
태실구조도
성주에는 태종 태실과 단종 태실도 있다. 가천의 단종 태실은 세자 책봉 후 이전되었다고 한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설명

 

세종대왕자 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 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 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자료)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전경.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되었다.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태실들은 정비(소헌왕후) 소생의 대군들 태실, 왼쪽으로는 후궁 소생의 군들 태실이다. 앞 가운데는 세조대왕태봉 가봉비
세조대왕태봉 가봉비와 수양대군(세조) 태실
세조대왕 태봉 가봉 비문. 태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가봉(加封)을 하는 전통에 따라 세웠다.

조선 왕실의 태실은 왕자와 공주의 태실인 아기씨태실과 왕의 태실인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구분된다.
태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격에 맞는 석물과 가봉비(加封碑)를 설치하게 되는데(가봉, 加封),

세조는 따로 석물을 설치하지 않고 아기씨태실 앞에 가봉비만 설치했다.

 

세조대왕태봉 가봉비(가봉비문 설명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지 8년이 지나 세웠단다.)
왕위에 오른 왕의 태실의 예 : 창경궁에 있는 성종 태실과 비 (예전 사진)
오른쪽으로 소원왕후 소생의 대군들 태실이 이어진다. 첫아들인 문종태실만 이곳에 없다. 임금에 오른 왕의 경우 따로 가봉했다.

세종대왕자 태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 유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태실은 예천 명봉사 뒷산에 있는데,

처음 자리에 아기태실 조성 이후 그 위치에 가봉(문종 즉위년 1450년)까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문종의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태실 앞에 가봉비(加封碑)만  세웠다.

보통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게 하거나 하여

태실 주위에 난간석 등을 두르고 가봉비를 세우게 되는데,

세조는 이곳에 그대로 두게 했단다.

"형제가 태를 같이 했는데,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의장과 석물은 고사하고 비만 세워 기록하라고 했단다.

왕위찬탈에 대한 미안함을 씻으려 했음인가!

 

 

 

소헌왕후 소생의 대군들 태실

수양대군(진양대군, 훗날의 세조) 태실부터 차례로 돌아본다.

반대편에서 바라보아야 비가 보이고 뒤로 태실이 배치된 것을 볼 수 있으나

편의상 울타리 따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소헌왕후 소생의 대군들 태실이 출생순으로 이어진다.

맨 처음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진양대군. 훗날의 세조) 태실 장태 날짜 표시
수양대군(훗날의 세조) 태실. 태실비 앞쪽에 세조대왕태봉 가봉비. 반대편에서 보아야 바로 보이지만 전체 배치상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보게 된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태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계유정난) 후 파기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 태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태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 태실. 세조 즉위 후 파손.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한 왕자들의 석물은 파기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 태실

 

세종의 열다섯번째 아들이자 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 태실. 세종이 가장 사랑한 아들로 세종은 영응대군 사저에서 숨을 거두었다.

 

 

원손(훗날의 단종) 태실

대군들의 태실을 지나 공간을 두고 11m쯤 떨어진 곳에 원손(단종) 태실
원손(단종) 태실
원손(단종) 태실

 

 

후궁의 아들들(군) 태실

입구쪽에서부터 출생순으로 이어져 있고,

아래 첫 사진 앞으로 보이는 태실은 마지막 왕자 당의 태실이다.

후궁의 아들들 태실. 처음 보이는 태실이 가장 늦게 태어난 왕자 담 태실이고, 끝에는 화의군 태실. 출생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제일 끝에는 마지막으로 태어난 왕자 당(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담양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영해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영풍군(어머니는 혜빈양씨) 태실

 

익현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수춘군(어머니는 혜빈양씨) 태실

 

밀성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한남군(어머니는 혜빈양씨) 태실

 

의창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계양군(어머니는 신빈김씨) 태실

 

군 중 가장 먼저 출생한 화의군(어머니는 영빈강씨) 태실. 세조 즉위 후 파손

 

세종대왕자 태실 전경
세종대왕자 태실 전경 (2022.11.18.금)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씨들(왕자, 공주)의 태를

격식을 갖추어 명당에 묻었다.

태실이 보통은 1기씩 조성되어 있는데 반하여

성주에는 19기의 태실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이채롭다.

이런 규모의 태실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태실이 일제에 의해 고양 서삼릉으로 일부 옮겨져서

현재 그곳에 많은 태실이 분포하기는 하지만 

강제 이전 조치에 따라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

원래 조성한 규모로 본다면 이곳이 단연 전국 최대 규모다.

세종대왕자 태실이 이 자리에 온전히 남아있어서

조선 초기 태실 형태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니 참 다행이다.

 

 

* 참고자료: 세종대왕자 태실 설명 동영상(문화유산 채널 자료)

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709002-001-V00004@N2R: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