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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충남 아산] 현충사의 가을 풍경

(2020.11.7.토)

11월 첫 주 토요일에 현충사와 곡교천 변 은행나무길을 찾으려고 길을 나섰었다.

이곳들은 몇번이나 찾았었지만 두 군데 같이 절정의 은행잎 단풍을 맞추기는 늘 어렵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지만 현충사 은행잎이 2주 이상 더 빨리 물드는 것 같다.

 

이런 모습(지난 방문 때의 모습)을 생각하고 갔는데, 이번에는 주차장의 은행나무에는 잎이 다 떨어졌네...
현실은 이랬다(2020.11.7. 토). 이웃한 곡교천은 아직 절정 전 상태였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2011년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입장구역을 들어서서 먼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들른다.
거북선 그림
조선 수군의 판옥선 등 여러 자료를 만난다.
한산전양해전도(1969년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 공동작.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 지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격퇴하는 장면)
특별전까지 돌아보고 나온다.

 

현충사

현충사 충무문
충무문을 들어서니 이런 단풍 숲이 반긴다. 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모습 아닌가!
충무문 주변

 

현충사 정려

현충사 정려에는

이충무공 장군과 공의 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 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 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 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정려(충무공 이순신,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홍무, 충민공 이봉상, 효자 이제빈의 현판이 걸려 있다.)
충무공 이순신 정려
조카 강민공 이완 정려
4대손 충숙공 이홍무 정려
5대손 충민공 이봉상 정려
8대손 효자 이제빈 정려
정려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웃한 연못쪽으로 향하게 된다.
연못 다리를 지나 오른쪽길 산책로를 따라서...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하는 고운 단풍을 만나니 나들이 나온 보람을 느끼게 된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항쟁하다 21세 나이로 전사(1597년)한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
충무공의 장인 장모 묘. 이분들의 무남독녀를 부인으로 맞았던 이순신 장군은 결혼 후 자연스럽게 아산 처가에서 살게 된다.
활터와 후손 묘(3, 4, 8, 10대 후손의 묘). 충무공의 묘는 여기서 9km 떨어진 곳(아산시 음봉면)에 위치. 여기 같이 있으면 참배하기 더 좋을 텐데......

 

활터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의 거리였고,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매년 4월 28일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는 전국 시·도 대항 궁도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활터 과녁판
큰 은행나무 두 그루.  충무공이 활을 쏘던 자리(활터)라고 전해지는 곳...
활터(지난 방문 사진)

 

고택

이순신 장군은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다.

따라서 처갓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본가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주하였다.

고택 뒤편에는 가묘(家廟)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의 신위(神位)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충무공 고택. 충무공이 무과 급제 전부터 살던 집으로 1960년대까지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던 집. 고택 뒤에 사당이 있다.

충무정. 충무공 가족과 후손이 1960년대까지 이용
충무공 고택
우물과 장독대
충무공 고택. 무늬 문양전 전시 중

모과가 익어가는 가을... 경내에 모과나무가 많다.

 

현충사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 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영정을 그릴 때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다.

내용은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 온 소치라 하겠다) 이다.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十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고 1970년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하였다. 

현충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현충사
충무공 영정을 모신 사당 현충사. 가운데에 영정, 옆으로 십경도가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서 내려다 봄.
가까이에 있어도 이렇게 다른 은행잎 색깔. 주차장의 은행잎은 다 떨어졌고...
돌아내려가며...
현충사 홍살문
1969년 4월 28일에 세워진 현충사 성역화 사적기. 충무공 탄신일에 세웠네...
현충사 경내의 불타는 단풍. 너무도 고와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방문 당시에 아산서각회의 작품들 전시 중~
아산서각회의 공동작품 '충•얼을 새기다2'. 충무공의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의 수결 연습한 장면을 모티브로 한 작품
이순신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는 뜻. 
이충무공의 시와 옥포해전 전에 병사들에게 한 말
충무공의 얼을 기리고,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충과 효를 표현
현충사 구 본전에 걸린 주련 글귀(정인보 선생이 바친 글)를 새긴 작품
‘서해맹산(誓海盟山)'-한산도에서 읊은 한시 ‘진중음’(陣中吟)의 한 구절. ‘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다짐한다’
한산도가(위), 마지막까지 나라를 걱정한 이순신 장군(아래 왼쪽), 진중에서 읊은 우국시 '진중음'(아래 오른쪽)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1597년 선조임금께 올린 장계(아래 왼쪽), 학익진도의 모습 그림(아래 오른쪽)

 

구 현충사

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구 현충사
정인보 선생이 쓰신 글 주련 내용
현충사 경내의 불타는 단풍
두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자꾸 뒤돌아보게 되었던 현충사의 가을~~~

(2020.11.7.토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