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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광주] 남한산성 본성 한 바퀴(북문-동문-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

[경기 광주] 남한산성 본성 한 바퀴(북문-동문-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

 

남한산성은 수없이 드나든 곳이다.

그런데도 전체를 한꺼번에 돌아보지는 못했었다.

갈 때마다 다른 멤버들과 동행하게 되어

주로 다녀온 곳들을 또 가게 되는 양상이었으니... 

미흡하지만 올 가을에 그 희망을 이루었다.



 

돌아본 코스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 남문


수어장대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 북문으로 회귀

(2019.10.27.일)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집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에 도착하니 이미 주차장은 만원이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동문을 벗어나 하행선주차장에 차를 대니

마침 중앙주차장까지 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

오전리 농산물판매장까지도 운행되는 셔틀버스~

'야호~!'

 

 

중앙주차장의 남한산성도립공원 안내도

 

 

컨디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제5코스로 점찍음

 

 

 

돌아볼 코스

북문-동문-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

 

 

원래 남문-동문-북문-서문-수어장대-남문 순서로

돌아보려고 했었지만

주차 위치가 달라져서 급 변경,

북문~동문 구간은 돌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곳부터 돌아보기로 하고 출발~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인조 2년(1624)에 신축.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을 지닌 문(전승문).

병자 호란 때 기습 공격을 할 때 사용했단다.

그러나 남한산성 최대 규모의 전투에서 참패한 적이 있단다.

 

 

남한산성 북문

 

보수 중인 성곽도 만나고,

길게 이어지는 성곽도 바라보며...

 

하남쪽인가 보다.

 

성곽길을 걷는 사람들~


제1군포터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로

원래 남한산성 내에 125개의 군포가 있었단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노송지대 근처를 지나며...

 

걸어온 성곽길을 바라보니

구불구불 꽤 걸은 것 같다.

 

제4암문(북암문)과 제2군포터

 

제4암문(북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으로

일종의 비밀의 통로.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다.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

 

 

 

 

 

 



북문의 보조 기능을 하도록 설치된 제4암문(북암문)

문 밖에서 보면 윗부분이 홍예문 형태.

아래로 내려가면 하남시

 

제4암문 밖에서 바라본 성곽

 

제2군포터이 터는 제법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네...

 

 

제4암문을 지나 다시 성곽길을 걸으며...

 



오르락내리락 경사진 곳이 많은 남한산성이라

스틱이 유용하게 이용되네...

 

제3암문

 



제3암문

안팎이 모두 홍예 형태를 보인다.

안쪽으로 단풍이 고운 형태를 보이고 있어

한 무리의 여인들이 인증 사진에 열중하는 모습도 만났다.

 

제3암문 밖으로 이어지는 길은 벌봉, 봉암성 가는 길이다.

본성 바깥으로 제12암문성에 붙어 있는 모습.

오른쪽 본성 안 꼭대기는 동장대터.

 

동장대터

동장대는 성의 동쪽에 있던 장대 건물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

인조 2년 산성 수축 시 건립.

18세기 초 붕괴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남장대와 서장대는 재건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단다.

 

수어청에는 전(前), 좌(左) 중(中), 우(右), 후(後)의 오영(五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 중영장은 북장대, 좌영장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머물렀단다. 

 

동장대터의 남한산성 여장

 

 

 

 

동장대터 앞의 남한산성 여장

오른쪽 끝은 보수된 모습...

그래도 오래되어 자연스러운게 더 끌린다.

 

동장대터에서 봉암성, 벌봉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며

다음에는 이쪽으로도 주욱 돌아봐야지 생각해본다.

 

동문 방향으로 내려가며 지나온 동장대터를 바라본다.

동장대터에는 쉬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사진은 패스~

우리도 저기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네...

 

동문쪽을 향해 내려가는 길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이 오가고 있다.

 

남한산성 군포지

 

여기는 단풍이 절정...

 

단풍이 예뻐서...


억새도 반가워서...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암문)

장경사 신지옹성으로 통하던 암문으로

밖에서 보면 윗부분이 'ㅡ'자 형태인 평거식문.

다른 암문들이 산성 수축 시에 같이 만들어진 것인데 비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을 때 신축한 것으로 보인단다.

 


 

장경사신지옹성

한봉성과 봉암성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

둘레 159m, 옹성 끝에 2개의 포대,

이방(무기와 화약 저장시설), 암문이 설치되어 있었단다.

 

 

 

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신지옹성에서 장경사 방향으로 가는 길


 

장경사

 

 

 

1958년의 장경사 모습(청암건축사진연구소 제공)

장경사는 인조 2년에 남한산성 수축 시 건립.

축성 후에도 승군이 머물며

성곽을 관리 보수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했단다.

충청도 승군들이 머물던 사찰이었단다.

산성 내의 다른 사찰들도 그런 역할을 했단다.

 

장경사

 

장경사

 

제1암문(장경사암문)

 



 

제1암문(장경사암문)

좌우 성벽을 돌출시키지 않은 형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넓어지는 형태.

이 암문을 나가 제16암문으로 출입하는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송암정(송바위정자)터

황진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 곳.

황진이가 금강산 수도를 마치고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니

감명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후 달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와 통곡 소리가 들려왔단다.

바위 위의 고사목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왼쪽 바위 위 송암정터 고사목(소나무)

 

 

송암정터 주변

 

동문 가까이도 가파른 성곽의 모습

 

아래로 길이 보이며 동문에 도착하고 있다.

 

동문(좌익문)

 

동문(좌익문)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이용된 문.

정조 3년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 성문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란다.

행궁을 중심으로 왕이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이고

동문이 좌측에 해당되므로 좌익문이라 함.

지대가 낮은 곳에 축조되어

아래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냈으므로

우마차의 통행은 되지 않는다.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제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문(좌익문) 바깥 모습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어려웠을 거라는...

 

남한산성 옛길 안내

노란색은 북문 노선 5.8km,

핑크색은 서문 노선으로 2.1km,

살구색은 동문 노선으로 9.5km,

파란색은 남문 노선으로 6.5km


 

남한산성 동문 주변

 

동문 앞 도로를 건너 다시 성곽길로...

 

수문

해발 300~400m 정도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파여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단다.

 

동문(좌익문)과 수문

 

수문 주변

 

제11암문(동암문)

남한산성 암문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우마차가 드나들 정도.

동문 대신 이 암문이 물자 수송로로 이용된 듯...

 

 

제11암문(동암문)

천주교 순교자들이 버려진 곳이기도 하여

시구문이라 불렸었단다.

 

 

신유, 기해,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천주교인 300여명이

시구문을 통해 이 계곡에 버려졌다고 한다.

 

수문을 통해 흘러내리는 물소리~

 

 

다시 성곽길을 걸으며 멀어진 장경사쪽을 바라본다.

가파른 길을 제법 걸어왔네...

 

오름길이 또 이어진다.

동문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든 남쪽으로든

가는 길은 가파른 길이 한참 이어진다.

 

제10암문과 제3남옹성

 

제10암문

 

제10암문

 

 

제9암문

 

동문쪽에서 남문쪽으로 향하는 길에...

 

남장대터

군사 지휘와 작전을 위해 지은 누각 건물이 장대.

남한산성 5개의 장대 중 하나로

성의 남쪽에 있었던 장대가 있던 터.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위치.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곳.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라는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제2남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히고

이 지역 주변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제2남옹성치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는 시설물.

남한산성에 다섯 개의 치 설치.

제2남옹성치가 규모가 가장 크다.

 

 

 

성곽 사이로 제2남옹을 바라보며...

성문 보호를 위한 이중 성벽인 옹성~

 

 

 

 

제2남옹성

둘레 318m이며,

남한산성 5개의 옹성 중 가장 큰 규모.

 

제2남옹성치 아래로 제8암문이 나 있고,

남문쪽으로 조금 더 향하면 제7암문...

 

본성 밖으로 보이는 제1남옹성

다음에는 저 바깥길로도 한 번 가봐야겠다.

 



제1남옹성

 

 

남문(지화문)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곳 주변은 전에 보수 중이더니

이리 깨끗이 보수되었다...

남문을 지나 영춘정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지겠네...

아무래도 우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 편이

오르막길이 조금 줄어들 듯...


남문(지화문)


 

남문(지화문)

남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4개의 성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병자호란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정조3년(1779년)에 기존 성문 자리에 새로이 성루를 만들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

 

 

남문(지화문) 바깥쪽 모습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에 주초석 대부분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성문 옆 숲속 의자에서 다시 간식 타임을 갖고,

성곽길 걸음을 이어간다.


남문에서 서문쪽으로 향하는 성곽은 보수 중...

성남쪽을 바라보았지만 시계가 영 흐릿해서 사진은 패스...


그래도 잠실 제2롯데타워는 찍어 보자...

미세먼지가 나쁜 날은 아니었는데, 이리 흐릿하다.


영춘정

1972년 천주봉에 새로 정자를 건립,

형태가 팔각이어서 팔각정으로 불린다.

남문에서 여기까지는 꽤나 오름길이 이어진다.


수어장대 근처의 제6암문만나고...


수어장대 가는 길에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인증 사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웃음짓게 하네...


수어장대 가는 길~

오른쪽 향나무 앞에서도 사진 찍는 사람들이...

 

 

청량당

남한산성 축조 당시 공사 경비 횡령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와

그 소식을 듣고 한강에 투신 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의 넋을 기리는 사당.

 

 

역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수어장대이다.

왼쪽의 보호수 소나무, 수어장대,

가운데 높은 나무 옆 누각이  ‘무망루(無忘樓)’ 편액 보호각,

오른쪽 끝에 매바위...

 

매바위

이회가 죽을 때

잘못이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사형 당시 정말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지휘와 관측을 위해 지은 누각.

병자호란 때 인조가 친히 군사를 지휘하며 45일간 항전하던 곳.

 

 

남한산성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장대로

 성 안에 남은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렸으나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달았다.

 

'무망루 ' 편액

수어장대 오른편으로 보호각이 보이는데,

원래 수어장대 2층 내부에 있던 ‘무망루(無忘樓)’ 편액을 옮겨 보관하고 있는 곳...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

 

수어장대를 나와 서문을 향해~

역시 걷기 평이한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

 

서문(우익문)

경사가 급하여 물자 이송은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쪽에서 남한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곳.

아픈 역사를 간직한 문~

인조 임금이 소현세자와 함께 이 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항복을 하고 화의를 맺었다.

(삼전도의 굴욕)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마천동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이어지는 곳,

전에 마천동에서 숨가쁘게 올라온 기억이...

 

 

 

전망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 잠실 제2롯데타워 방향.

병자호란 때는 청의 대군을 바라보며 침통해했을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화려한 서울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알려진 곳.

 

 

 

매탄터(매탄처)

숯 묻은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 내에 매탄터가 꽤 많았다고 한다.

유사시에 버티려면 숯(연료)이 많아야 했기에...

 

이동하여 연주봉 옹성을 바라보며...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제5암문 근처에도 매탄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산성 내에 수십 개의 매탄터가 있었다니...

 

 

 


연주봉옹성

옹성 둘레 315m.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잘 보이고,

이성산성과 하남 춘궁동 일대도 잘 보인다.

본성과 연결되는 곳에 암문(제5) 설치.


연주봉옹성과 본성, 제5암문

 

 

 

산성리의 변천사

조선시대 한양은 2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런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만하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로

산성 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할 정도였단다.

1627년(인조5년)에 광주부의 읍치(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로 옮기면서

산성 내의 인구가 폭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1895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 개편에 따라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규모가 줄어들게 된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의 광주군청이 경안동으로 이전하면서

군사도시, 경제도시로서의 위용은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면서 주요 도로는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된다.

이후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하였다.



금림조합 이야기

잘 가꾸어져 내려온 남한산성의 산림~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려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의 산물...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산들은 민둥산이 되기 일쑤였지만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단다.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보호했기에

지금처럼 건강한 숲으로 남아있게 되었단다.

금림조합은 산감(산림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했다고 한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해서

숲 보호와 극빈자 구제에 도움이 되었단다.

남한산 금림조합의 노력은 2016년까지 90년 가까이 지속,

덕분에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이 잘 보존되어 온 것...


북장대터

남한산성 수축시에 건립했던 북장대는

단층 누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

18세기 초에 붕괴.

한봉성과 연주봉옹성 축성으로 실효성이 없어져

재건되지 않았을 거란다.


 

본성 한 바퀴 막바지 발걸음을 이어간다.

 

성곽 돌기를 시작하여 지나갔던 성곽들이 저만치 눈에 들어오고...

 

 

드디어 처음 시작했던 북문이 눈 앞에...

감격으로 맞이하는 회귀점!

 

 

 

남한산성 본성 한 바퀴~~~

드디어 목표 달성!

본성 한 바퀴와 오간 길 포함하면

최소 9km 이상 걸은 것 같다.

전날은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을 한 바퀴 돌았으니

간만에 긴 거리를 걸었네...

 

성곽 돌기 완주 기념샷 한 번 더~

(2019.1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