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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성주] 고향 나들이 - 한개마을, 산소, 성밖숲

[경북 성주] 고향 나들이 - 한개마을, 산소, 성밖숲

 

2016.10.15(토)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친정 엄마 생신에 맞춰

형제들이 김천휴양림에서 1박 하기로 하였는데,

아버님께서 산소 정비를 하신다고 하여

겸사겸사 고향을 찾게 되었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고향을 떠난지 4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꿈에서나 그리는 고향이 되어버렸다.

 

 < 1박 2일 가족모임 여정 >

제 1일 : 성주 한개마을-성밖숲

제 2일 : 김천 수도산자연휴양림-청암사-수도암-직지사

 

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시골 동네, 한개마을...

눈에 익은 풍경~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한개마을 모습과 안내 설명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화해설사님도 계신다.

 


 

성주한개마을 (星州한개마을)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의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入鄕)하여 거주한 때로부터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하여 살고있는 전통깊은 마을이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동에 이르고 있으며,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출처 : 문화재청)

 

 

 

산소 가기 전에 잠시 짬을 낸 우리는

살짝 동네를 돌아보기로 하고~

먼저 월곡댁, 응와종택, 교리댁이 있는 쪽으로...


 

만나기로 한 시각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먼저 응와종택(대감댁)부터...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순조 21년(18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고종 3년(186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굿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은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한옥 주택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한개마을의 대표 고택인 응와종택


 

응와종택 솟을대문

'응와세가'로 이름을 바꿔 달았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북비와 북비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던 돈재 이석문이

고향으로 내려와 북쪽으로 문을 내고 은거한 곳...


 

왼쪽으로는 사랑채...


 

안채


응와종택은 대감댁으로 불린다.

'1박 2일', '패밀리가 떴다' 등을 촬영하기도 한 장소...


안채 왼쪽 뒤로 사당...

 

 

마당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있다.


 

솟을대문을 바라보며...


 

응와종택을 나와 위를 바라보면 월곡댁이다.



북비공 돈재 이석문 신도비...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이던 돈재공의 신도비




대산동월곡댁 (大山洞月谷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호

 

한개마을 북쪽 영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한옥으로

대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가옥 경치가 눈길을 끄는 곳이다.

1911년 이전희씨가 지은 집으로

가묘와 별당은 1930년에 늘려 지은 것이다.

집 이름은 이전희씨의 부인이 초전면 월곡동에 시집왔다하여 붙였다고 한다.

건물들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이 一자형을 갖추고 있고

아래채, 고방채, 중문채 등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는 남쪽에 있으며 안채의 공간 구조는 규칙적이고 정교하다.

가장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는 사랑채는

안채와 달리 담과 건물들의 선이 틀에서 벗어난 공간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각 건물들은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모든 활동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일어나도록 꾸몄다.

이것은 이 마을 고유의 건축배치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주위의 다른 집들과 함께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당시 생활양식과 건축사 민속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 조선시대 양반집이다.

 

(출처 : 문화재청)


 

월곡댁

 



월곡댁 또한 규모가 상당하다...




 

대산동교리댁 (大山洞校理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제 43호

 

조선 영조 때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낸 이석구 선생이 지은 집이다.

교리댁이라 한 것은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기 때문이라 한다.

서향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곧바로 사랑마당이 있고,

사랑 왼쪽에 서재가 있으며 뒤쪽에 사당이 있다.

안채는 중문채를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떨어져 있다.

안채는 앞면 7칸·옆면 1칸 집으로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방이 2칸씩 있으며, 동쪽에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집으로

왼쪽 대청 2칸은 문을 달아서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였다.

동쪽에 반칸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뒷간, 다락 등이 있어 구성이 특이하다.

중문간은 중문과 사랑채 사이 공간에 담을 쌓아 내·외담을 만든 것이 흥미롭다.

원래는 안채의 남쪽에 중문채가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건물이 독립해 있는 것은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문화재청 자료)

 

 

응와종택 못 미처에 교리댁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는 커다란 감귤나무가 이 집의 마스코트처럼 서 있다.

 

 

아담한 사랑채

 

 

사랑채에 걸린 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방에도 추사의 글씨가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한 칸짜리 사당이다.

주변에는 여러 가지 식물을 가꾸어서

어느 계절이라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고목이 된 소나무가 일품이다.


 

이 건물은 특별하게도 학교의 역할을 했던 곳...

 

이곳 교리댁에서 해설을 하시는 분을 만났다.

재미있게 해설을 하시길래 잠시 따라 돌게 되었다.


 

해설사님과 함께 다시 응와종택...


 


 

 

북비채에 앉아서. 북비문을 바라보며..

 

해설사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에 처할 당시

북비공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신분이었다.

세손(후일 정조)을 등에 업고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곤장을 맞고 파직되었다.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후에 영조가 다시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그의 손자가 장원급제 했을 때 정조임금이 특별히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

고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노론이 득세하던 때라

남인 신분으로서 장원급제란 쉽지 않았던 터~

장원급제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용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

정조임금에게도 급제자에게도 남다른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석문의 증손인 응와 이원조 공은

18세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니 최연소 대과 급제생이라 한다.

18세에 대과에 급제하자

부친이 '소년으로 대과에 오름을 경계'하라고 하였고

응와는 그 가르침을 따랐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강의가 이어지는 도중인데,

형제 모두들 산소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하고...

강의 도중이라 바로 일어서지 못해서 몇 분 더 머물렀다.


 

산소에 도착하니 아직도 정비 중이었다.

며칠간 작업을 한 모양인데,

유골분을 넣는 마지막 작업이 있는 날.

몇 곳으로 흩어져 있던 묘소들을 한 곳에 모으는 작업...

봉분으로 되어 있던 묘소들이 다시 태어난 날...

이렇게 4대조까지 한 곳에 모아졌다.



앞으로는 이럴 필요도 없을 텐데~

그래도 80이 넘으신 아버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생전에 해 놓아야 마음편히 가실 수 있다는 생각이시다.



잔디가 가득하던 묘소 주위가 휑해져서 우선은 썰렁해 보인다.

세월이 좀 흘러야 잔디가 자리를 잡을 것이고

주변도 조금 아늑해지겠지...


 

산소 아래 너머로 한개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오후 5시가 되어도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예상보다 작업이 너무 오래 걸려서

4시간이나 산소 아래에 머물게 되자

기다리다 지친 형제들은

잠시 읍내의 성밖숲이라도 다녀오기로 하였다.

원래는 산소 찾아 인사 드리고

성밖숲과 세종대왕자태실, 선석사를 찾을 예정이었다.

이미 가 본 곳이기는 하지만

형제가 다 모여서 가는데 의의를 두었었는데......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동네 들판을 바라보며~


 

성주 경산리 성밖숲 (星州 京山里 城밖숲)

 

천연기념물  제403호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 성주 읍성(邑城) 서문 밖에 만들어진 숲으로

조선 중기 서문 밖의 어린 아이들이 이유없이 죽자

풍수지리설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성밖 숲에는 나이가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59그루가 자라고 있다.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 왕버들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으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풍수지리, 역사, 문화, 신앙에 따라 만들어진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향토성, 민속성, 역사성 등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성주읍내 성밖숲에 도착했다.

멋진 왕버들의 모습...

 

 

 

 

이 숲은 조선 중기에 서문 밖의 어린 아이들이 이유없이 죽자

풍수지리설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느새 해가 지는 시각...

 

 

 

 

 

 

이천과 성밖숲

 

 

안개가 끼어 더 몽환적인 모습...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들이다.



맥문동이 필 때면 더 멋진 숲의 모습이려니...

커피 한 잔 하며 잠시 숲을 돌아나온다.

 


저녁 6시 조금 넘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야 작업이 끝났다고 하신다.

성밖숲을 다녀오니 어느새 어두워졌다.

저녁인데 마을에 웬 차들이 이렇게 많을까~~~


 

알고 보니 토요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구비구비 무흘구곡을 거쳐

김천 수도산휴양림까지 가야 하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동네를 떠나게 된다.

 

2016.10.15(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