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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예천] <정감록(鄭鑑錄)>에 나타난 십승지 중 한 곳, 예천 금당실 마을

[경북 예천] <정감록(鄭鑑錄)>에 나타난 십승지 중 한 곳,

예천 금당실 마을


<2015.5.24~25 문경 예천 여행>

* 2015.5.24(일) : 문경 김룡사와 대승사, 문경 대하리 소나무,

내화리 삼층석탑, 경천호, 오미자 특구,

그리고 예천 용문사. 예천 초간정 원림, 금당실 마을,

예천권씨 초간종택, 병암정, 가오실공원, 회룡포, 용궁

* 2015.5.25(월. 부처님오신날) : 문경 봉암사



금당실 마을


금당실은 마을 내에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니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이곳!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

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마을 앞을 흐르는 금곡천에서 사금이 생산되었다 하여

'금당곡', '금곡'이라고 유래된 금당실 마을~

임란 당시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닮았다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전해진다.

마을 여러 곳에서 황진이(2006) 등 드라마를 찍었기도 하다.


(출처 : 금당실마을 홈페이지 자료 발췌)



천연기념물 제469호 예천 금당실 송림 (醴泉 金塘室 松林)


예천 금당실 송림은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는 땅을 일컫는

십승지지의 한군데로 알려져 있는

예천 용문면 금당실 마을의 수해방지와 바람막이를 위하여 조성된 송림이다.

금당실 서북쪽에 위치하는 숲으로

오미봉 밑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수백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 학교, 농경지 및 민가와 인접되어 있다.

금당실 송림은 상금곡동이 낙동강 지류인 복천, 용문사 계곡, 청룡사 계곡으로

흐르는 계류가 만나는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어

해마다 여름철 하천물이 범람하므로

수해방비와 겨울철 북서한풍을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조성하였으나,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되어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구출 비용 마련을 위한 나무 벌채가 심하여

1895년(고종 32년)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5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이 마을 보호를 위하여

이 숲을 보호하고 관리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휴식처와 행사의 중심지로 활용되는 등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큰 마을 숲이다.

(출처: 문화재청)


예천 금당실 송림은

오미봉 밑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수백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금당실 송림을 둘러본 후 마을 탐방을 하기로 하였다.

송림 옆에 넓은 터가 있어 차를 대기에 좋았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서원 앞에는 박충좌, 박눌, 박손경 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금곡서원은 치암 박충좌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박눌과 박손경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

현재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담 너머로 금곡서원 편액을 바라보며...

문이 닫혀 있지만 옆 오른쪽으로 돌아서 관리인 집 대문으로 들어가면 살펴볼 수 있다.


서원 앞에 세워진 신도비들


금곡서원 앞을 지나 금당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마을 골목길마다 이정표가 잘 표시되어 있다.


현재 금당실 마을에는 한옥체험시설들이 많다.


어느 집에서는 이렇게 양봉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담장 아래에 이렇게 예쁘게 단장된 꽃밭도 참 예뻤다.



다양한 지붕의 모습들도 볼 수 있었고...



진사당


월당화옥



김대기 가옥


김대기 가옥



유천초옥


새로 짓고 있던 금당실 마을 체험관



돌담을 가득 메운 담쟁이덩굴, 돌담가에 피어난 꽃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골목길을 따라서~





남야 박손경 선생 사당

금곡서원에 배향된 분이시다.


사당 앞쪽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길을 따라서~


골목길이 아름다워서 지루한 줄을 몰랐다.


마늘밭...

 곧 수확할 때가 된 모양이다.



우천재.

대문채는 초가지만 안쪽으로는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다.


광서당 대문채

행시 합격이라니 자랑할 만하다. 


광서당

금당실 마을에는 대문채 지붕이 초가로 이어지고,

안쪽의 사랑채나 안채는 기와로 이어진 집이 많았다.


여기는 민박집 돌담사랑.

넓은 잔디밭~ 화초들이 가득한 공간...



반송재 고택 대문간채


 반송재고택 (伴松齋故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2호


갈천 김빈이 살던 가옥이다.
김빈은 조선 숙종
때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으로

벼슬을 그만둔 후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살았다.

이 집은 김빈의 아우 김정이 세운 것으로

후에 자손들의 가세가 기울자 팔았고

구한말 이유인이 사들여 광무 3년(1899)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담장 안에 있는 안채와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하였고

곳간채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사랑채 앞에 담장과 연결된 대문채가 있는데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를 보여 준다.

(출처 : 문화재청)


반송재 고택 사랑채

왼쪽으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보인다.


반송재 고택 사랑채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반송재 고택 안채

금당실 마을에서 가장 큰 고택인 듯 보였다.

구한말에 이유인이 사들여서 옮겨 세웠고

현재는 김씨 가문에서 다시 매입하여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금당실 마을을 돌다보면 걷는 내내 심심하지가 않다.

다양한 가옥들, 돌담, 토석담 등~


민박을 겸하는 덕용재 고택


금당실 마을 경로당


골목길이라지만 제법 넓다.


정겨운 돌담~


금당 주막


또한 동네 뒤로 오미봉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추원재, 사괴정 고택 등

마을을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고택이 있는 마을 골목길들을 돌아 큰길이 있는 곳으로 나가 보았다.

제법 상가가 길게 늘어선 마을이라는 걸 한눈에 느끼게 된다.

그 중 '낭만이 살아있는 추억의 금당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음식점이었던 모양인데,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가게를 가득 휘감은 담쟁이덩굴~

금당실 마을의 역사처럼 오래된 느낌이 나서 좋았던...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승지!

금당실은 정감록(鄭鑑錄)에 나오는 십승지지(십승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단다.

마을을 돌아보니 정말 넓고 평평한 터를 지닌 곳이었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본 후 인근의 초간종택으로 향하게 된다.


2015.05.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