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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청주 중앙공원3(조헌, 영규대사, 박춘무 전장기적비)

 

청주 중앙공원3(조헌, 영규대사, 박춘무 전장기적비)

 

 

조헌 전장기적비(淸州趙憲戰場記蹟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자리하고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기허당 영규대사 전장기적비

영규대사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고 하며,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대사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민양공 화천당 박춘무선생 전장기적비 

박춘무는 박팽년의 아우 박인년의 8세손으로 토정 이지함의 문인이며 조헌과는 동문이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손수 격문을 지어 널리 전하였고 곳곳의 의병이 700여명에 달하자 병법을 익히고 병장기를 다듬어 조헌,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공론에 따라 조헌은 영동 이하를 맡을 좌의대장으로, 박춘무는 금강 이하를 맡을 우의대장으로 정하였다.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다고 하여 좌의군은 금산으로,  우의군은 진천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왕이 계신 의주가 위태롭다고 하자 근왕하였으며, 왕이 환도하자 공은 환향하여 강학에만 전념하였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사후에 왕이 민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동명은 병자호란 때 순국하였고, 손자 홍원은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웠다. 3대가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것.  

 

 

 

牧使 김효성 청백선정비 

 

 

어느 牧使의 선정비인 것 같은데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2011.05.2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