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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세계/인도

2008.01.04(금) 인도 2(델리)

 


< 제 2 일 > 2008.01.04(금)
 
 
* 06:00 기상. 한국 시각으론 09:30이니 실컷 잔 셈.
  눈이 뜨이긴 했지만 친구의 잠을 방해하기 싫어서 엎치락뒤치락만 했는데 덕주도 깬 모양이었다. 모닝콜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길래 누워서 이야기 나누었다. 도중에 자경이가 찾아왔다. 모닝콜 시각을 잘못 알고 왜 연락이 없나 생각했다며... 우리는 누워 있는데, 자경인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우스워서 같이 크게 웃었다.
* 07:30 모닝콜
* 08:30 조식(호텔식) - 빵, 에그 스크럼블, 토마토, 바나나, 사과 등
* 09:00 델리 투어 출발
 
 
★ 현재의 인도 
    29개 주, 인구 11억여 명(2006년), 언어 14개 + 영어
    약 5,500km 도로 건설 중이라고...
    인도어는 1843년부터. 힌두교도가 대부분.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 산스크리트어)
      세계 4대 문명으로 불리우는 인더스 문명 발상지      
 
★ 델리 
    델리는 심장이란 뜻. 2000년 된 도시. 인구 약 1,400만.
    지하철 1, 2호선(차량 한국산).  08:00~11:00 러시아워
    델리는 인도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델리는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나뉘어진다.
    올드델리는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무굴 제국의 중심지로서
    좁은 골목길과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반면 뉴델리는 1911년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이
    수도를 콜카타(캘커타)에서 이곳 델리로 옮겨와 개발한 지역이다.
 
 
 
[오전 1 코스]
* 2만 명 동시 기도할 수 있는 회교 사원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는 인도 최대의 이슬람사원으로 사암으로 건설된 사원이다. 술탄 샤 자한(Shah Jahan)에 의해 1644년부터 1658년에 걸쳐 완공되었다(샤 자한의 첫째딸이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엄청난 돈인 10만 루피가 사용되었다고... 이 사원은 한 번에 2만여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라고... 덧버선을 가져갔지만 차 트렁크에 있는 큰 가방에 넣어둔 터라 할 수 없이 사원 입구에서 파는 덧양말을 하나 샀다. 옷차림도 반바지, 나시 등은 금지라고 하였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스퀘어모양의 넓은 광장이 반겼다. 가운데에 연못이 자리잡고 었었고 바닥에는 천이 줄줄이 깔려 있었다. 일반인들은 연못 물에 손발을 씻고 그 천에 앉아서 기도하는 모양이었다. 관광객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이슬람양식의 돔형 건물과 첨탑을 보며 사원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카메라 가진 사람만 보면 관리원이 나타나서 표를 확인하였다. 이 사원에선 카메라피를 따로 6$씩 받는다며 사진 안 찍을 사람은 카메라를 차에 두고 가라고 하더니...  사진 찍는 데도 돈을 받다니 참 특이한 일이었다. 하긴 카메라 금지 지역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자마 마스지드를 관람하고 차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자경이 카메라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른 건 다 있는데 카메라만 없어지다니... 맨 먼저 도착한 상순언니 말에 의하면 관광을 마치고 차에 돌아왔을 때 차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는데, 버스 기사는 우리가 오는 걸 보고 문을 열었다고 하였다. 어쨌든 카메라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가이드는 어떻게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고 하였다. 자경이도 그 문제로 처음부터 너무 실랑이를 벌이면 모든 여행객들이 이번 여행을 망칠 것 같아 조금 참고 강력하게 항의하지는 않았다. 어이없었지만 찾을 방도가 없었으므로. 후진국을 여행할 땐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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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 코스]
* 영국인이 건립한 위령탑 인도문(인디아게이트)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던 인도 군인들을 위한 위령탑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인도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영국의 요청으로 유명을 달리한 수 만 병사들의 위령탑. 외벽에는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이 문의 높이는 42미터. 
  잔디 밭 안에 위치한 또 다른 기념비는 아치형의 모양,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에서 죽어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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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 코스]
* 정부 BUILDING
 
  버스로 한 바퀴 돌면서 관광, 광장을 중심으로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등이 널찍이 모여 있었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보이는 철골 구조물이 조금 흉물스러운 모습. 아직은 정돈이 덜 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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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무굴식] 13:30
  탄두리식 치킨, 마더 치킨, 란(밀빵), 밥, 팥죽(편의상), 아이스크림
  탄두리식 치킨과 마더 치킨, 팥죽이 맛이 좋았다. 이런 식이 인도식이라면 이번 여행에선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는 생각...
 
 
[오후 1 코스]
* 연꽃사원(Lotus Temple)사원 = 바하이 사원(Bahai Temple)
 
 
  바하이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외관을 따서 연꽃사원(Lotus Temple)으로 부르고 있으며, 40미터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장엄한 사원은 현대 인도의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나. 바하이 종파의 소유, 현재 델리의 빼어난 랜드마크가 되었다. 대리석과 시멘트, 백운석으로 만든 경이적인 건축물이다. 27개의 거대한 연꽃잎 모양의 사원으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입장이 허용된다.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는 관광객들의 입장이 불가능하며,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개방한다고.
 
  신발을 쌀푸대 같은 것에 넣고 입장했는데, 내부가 무척 넓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돌의자(대리석인 듯)가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단하다며 한마디 하는데 관리원이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실내에선 말을 하면 안 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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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 코스]
* 나눔을 실천하는 종교 시크교 사원
 
  시크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로 여러 종교의 좋은 점을 따서 만든 종교라고 한다. 여기를 방문하려고 갔을 땐 이미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예고 없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 같았으면 예고 없이 교통 통제했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 간디 화장터
 
  시크교 사원 통제로 인해 대신 간디 화장터로 향했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9세기 위대한 영혼. 간디(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바이샤 출신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끈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이다. 유학 중 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그는 인도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을 결심한다. 간디의 비폭력 항쟁으로 인도는 결국 독립하게 되지만 인도는 내부분쟁으로 또 다시 분열, 간디는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한 힌두교인에 의해 암살당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중학생들이 몰려왔다. 교복 입은 학생들의 가슴에는 학생증인 듯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살펴보니 나이, 이름 등이 쓰여 있었다. 대부분 14~15세의 학생들로 중학생인 모양. 그네들은 서로 사진 찍히려고 아우성이었다. 자기들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으니 신기한 모양.  
  성처럼 둘러싸인 공간... 그곳엔 성화가 타고 있었다. 24시간 불을 밝힌다고 하였다. 화장장소 앞에선 베 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디를 기리는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의식이란다. 둘레를 한 바퀴 돌아나와 인도 전통 복장을 한 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델리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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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기차로 델리 출발, 바라나시로
 
  17:40 델리역에 도착하니 짐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흥정을 하고 달구지같은 짐수레 두 개에 캐리어가방을 싣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꽤 긴 거리였다. 빈 몸인 우리들보다 수레꾼의 걸음걸이가 더 빨라서 우리는 뛰기도 하였다. 주변 환경은 수도답지 않은 지저분함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우리는 수건으로 입을 가려야만 했다. 또한 인산인해여서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했다.
  18:30 정시에 기차가 출발했다. 말이 침대기차지 짐칸이었다. 침대칸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기가 차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불평을 했는데, 대학생인 듯한 이가 이 침대칸은 너무 좋은 거라 하였다. 하긴 다른 칸에 짐짝처럼 사람들이 실려 있는 걸 본 터라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가 탄 곳엔 2층과 3층 침대가 있었다. 일행 중 부부팀이 3팀 있어 그네들은 2층을, 서럽게도 우리 같은 과부팀은 3층 침대를 써야 했다. 우리 칸에선 덕주와 내가 3층을, 자경인 2층을, 무게 좀 나가는 길수언니는 1층에서 자기로 하였다. 자청해서 3층을 쓰겠다고 했지만 겁이 유달리 많은 나로선 거기 올라갈 일도 거기서 잘 일도 큰 걱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1층에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저녁 식사도 하였다. 서띠여 박사가 한국에서 쌀과 밑반찬을 많이 준비해 와서 저녁은 너무 맛있게 먹었다. 한국쌀밥에 감자조림, 계란조림, 콩장, 고추절임, 마늘장아찌 등을 반찬으로 주어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우리 좌석엔 인도인 노부부가 같이 탔는데,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권했으나 괜찮다고 하였다. 인도에선 낯선 사람끼리는 음식을 나눠 먹지 않는단다. 우리끼리 먹으려니 조금 미안하여 권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니 이내 포기하고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한참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때서야 노부부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였다. 접시 세 개에 오이를 깎아 담고 빵을 담고 무슨 만두속 같은 걸 담았다. 그 중 하나를 서띠여 박사에게 갖다 주는 것이었다. 기차에서 만나 얘기하다 알게 된 건데, 그 할아버지(대학교수하다 퇴직했단다)와 서띠여 박사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던 것. 노부부는 오른손만 사용하여 빵을 찢고 속을 넣더니 맛있게도 먹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씻지도 않은 손으로 먹는 게 신기하기만 하고 더러운 것 같은데...
  드디어 잘 시간... 3층에 올라갈 일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 올라갈 것 같아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올라갔으나 천정에 머리가 닿아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시트를 깔고 이불을 펴야 하는데... 사람이 사는 일~ 어려움이 닥치면 적응하게 돼 있나... 어떻게 겨우 몸을 움직여서 시트 깔고 이불 덮고... 자리에 누우니 그나마 좀 나았다. 2층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을 거고 1층은 좀 나았으리라.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으나 다음 날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했다. 기차는 암흑의 세계로 세계로만 달음질치고 있었다. 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 그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한참이나~~~
  다음 날 아침 5시에 잠이 깼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혼자서 내려가려니 다리가 떨려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도저히 못 내려가겠어서 1시간 반이나 참았다. 6시 30분에 연숙 언니의 도움으로 겨우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바라나시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으니 그 긴 시간을 서 있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시 3층으로 올라가 누워서 쉬었다. 불편해도 누워 있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무서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7시가 되니 태양이 떠올랐다. 광활한 그 땅 위를 비추는 위대한 태양이... 7시 30분이 되니 아래층 사람들이 깨기 시작해서 2층 침대를 철수시키고 1층에 모여서 재잘재잘 아이들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난생 처음 침대기차에서 잠을 자 봤다. 나이 더 들면 이런 짓은 정말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나로선 좋은 경험이었고 평생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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