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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수원] 조선 성곽 건축의 백미 수원화성을 거닐다 / 행리단길 맛집, 골목집

용연과 동북각루(방화수류정) (2022.09.28.수)


수원 화성 일부를 거닐다

* 코스: 장안문~화서문~행리단길~나혜석생가터~행궁동벽화마을

~화홍문(북수문)~방화수류정(동북각루)~북암문~용연~장안문

가끔 산책삼아 가는 곳 중에 수원 화성이 있다.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의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으로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야심차게 건설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신도시 계획과 함께 축조.

1794년 축성 시작, 1796년 완공.

길이 5.74km.

4개의 성문(동-창룡문, 서-화서문, 남-팔달문, 북-장안문),

공심돈, 포루, 각루, 장대, 암문 등을 두었다.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정약용의 설계 계획에 따라 건축되었으며

거중기(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와

유형거(건설 자재를 나르는 수레)가 사용되었다.

영의정 채재공의 지휘.

축성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어 

당시 축성의 모든 과정을 알 수 있고

지금도 그에 맞는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궤에 공사설계도며 공사에 동원된 인부 이름 등까지 기록하였으며

수원 화성의 석재 곳곳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건축 실명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화홍문공영주차장(당시에 주차장 정비 중이라 무료 이용했고, 10.10부터 유료)에 차를 대고 장안문으로...
장안문. 앞쪽으로 반원형의 옹성. 옹성 가운데에 오성지(화재 대비. 실제는 물이 성문에 닿을 수는 없었던 구조였다네.)

 

장안문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

성문의 바깥에 반원형의 옹성을 두었는데,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남문이 정문으로 쓰이나 

당시 임금이 한양(서울)에서 수원으로 행차하므로

먼저 맞이하게 되는 장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 백성들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들의 수도였던 장안(현 시안, 서안)에서 따왔다.

화성도 장안성처럼 융성했으면 하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장안문. 옹성문을 들어서면 정문인 장안문 현판이 보인다.
옹성에는 오성지를 두어 화재에 대비했다. 장안문 안으로 들어서서 화서문 방향으로 성곽길을 걸으며~
성밖 장안공원
수원화성 북지터. 성 안에 원래 5개의 연못이 있었단다.
북포루(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다.

 

 

 

수원 서북공심돈 (水原 西北空心墩) : 보물

화성의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정조 20년(1796)에 건립되었다.
수원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측면의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하부 치성(雉城)은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1층과 2층 외벽과 3층 하부는 전돌로 쌓았다.
1,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銃眼)이 있으며, 3층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포루(鋪樓)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箭眼)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懸眼)을 두어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부는 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수원 서북공심돈의 성제(城制)는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수원 화서문 (水原 華西門) - 보물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화서문 옹성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화서문 옹성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화서문으로 내려가서 행리단길을 향해 가는 길에 만난 행궁동 상점 안내지도
수원 화성 화서문과 화서문 안내소를 지나오고...
점집이 유난히 많아서 점집골목으로 불리는 곳. 소나무가 늘어선 거리여서 걷고 싶은 길~ 이 주변을 중심으로 행리단길인 모양이다.

 

 

나혜석(1896-1948) 생가터

아래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의 나혜석 연보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출생.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최우등 졸업.

여성 최초의 유학(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 입학).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1914년,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學之光)》 3호에

최초의 근대적 여권을 주장하는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 기고.

1917년, 동경에서 여성유학생들의 모임으로 조선여자 친목회 결성 및 《여자계(女子界)》 발간

1918년, 동경여자미술학교 졸업. 여성 최초의 소설 <경희> 발표.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5개월간 옥고.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1921년, 남녀 최초의 유화 개인전(경성일보 내청각 京城日報 來靑閣).

1927년,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및 파리 유학.

제6회 《선전(鮮展)》에서  <봄의 오후>가 무감사로 입선.

1929년, 수원불교포교당에서 귀국 개인전.

1930년 김우영과 이혼.

1931년, 제10회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정원(庭園)> 특선. <작약(芍藥)>과 <나부(裸婦)>가 입선.

1934년, 《삼천리(三千里)》 8~9월호에 <이혼 고백서> 발표.

1935년, 2월경에 수원군 태장면 지리 557번지로 집을 옮김.

1948년(52세) 서울시립자제원(현 용산구청 자리) 무연고자로 병실에서 세상을 떠남.

(생가터 표석 뒷면의 나혜석 연보에서...)

나혜석 생가터.&nbsp;카페 샌디 벽면에는 나혜석의 작품 <화령전의 작약>이 그려져 있다.
카페 샌디 벽면에 붙은 나혜석 생가터 표시
골목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사진 찍기도 어려웠네.

1995년, 정월 나혜석 기념사업회 발족

1999년,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움 개최

2000년, 2000년 문화인물 중 2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됨. <나혜석 생애와 그림전> 개최. 나혜석 거리 조성

2001년, <정월 나혜석 전집> 발간. 나혜석 동상 제막

2003년, 나혜석 학술대회 논문집 [1] 발간. 나혜석 평전 <내 무덤에 꽃 한 송이 꽂아주오> 발간

2005년, 제9회 여성학술대회에서 제8회 나혜석 바로 알기 국제심포지움

2009년~ 나혜석 생가 거리미술제 추진

2011년~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추진

(생가터 표석 뒷면의 나혜석 연보에서...)

뒷면에 나혜석 연보
인근 골목에도 나혜석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수원 맛집, 골목집

수원 맛집으로 이름난 집.

'허영만의 백반기행'과 '맛있는 녀석들'에 나왔다.

오래된 집이라 집 분위기는 좀......

두 번 가 봤고,

한 번은 갈치조림, 또 한 번은 묵은지 고등어찜~

묵은지 고등어찜도 맛있지만 싱싱한 갈치조림이 정말 맛있다.

울엄마가 해주시던 맛과 비슷해서 다음에도 갈치조림을 먹을 생각이다.

가성비 짱인 음식점.

수원 맛집, 행리단길 맛집, 골목집
첫 방문 때는 갈치조림을 추천받아서 갈치조림 2인분 주문.
생각보다 갈치 양이 엄청 많았다. 밥을 다 먹고도 남을 양... 양은냄비라 폼새가 좀 그렇긴 하네.
곁들이 반찬들도 다 맛이 괜찮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소나무가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인 길~
건물 벽에 주변이 행리단길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붙어 있네.
화서문로를 따라서 행궁동 벽화마을로~
행궁동 벽화마을에서는 대안공간 눈, 수원양조조합 등 여러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행궁동 벽화마을은 다음에 다시 한 번 올려봐야지...
행궁동 벽화마을 안내지도
수원천변.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 안내. 지난해는 화서문 앞에서 하더니 올해는 화홍문, 남수문, 수원천 일원에서 빛쇼가 펼쳐지네.

 

 

화홍문

수원 화성의 2개의 수문  중 북쪽의 수문이다.

7개의 수문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다.

화홍문, 방화수류정, 용연이 있는 이곳이 

수원 화성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

1794(정조18)년 2월 28일 공사 시작,

1795년 1월 13일 완공.

수원천과 북수문(화홍문)
화홍문에서...
화홍문에서...
화홍문

 

 

수원 방화수류정 (水原 訪花隨柳亭) - 보물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방화수류정(동북각루). 1794년(정조18) 10월 19일 완공.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는 뜻을 지님. 군사 감시 지휘소와 정자의 기능
방화수류정(동북각루). 수원 화성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수원 화성 건축물 중 백미
방화수류정에서 본 동북포루(왼쪽 위)와 북암문(오른쪽 가운데). 성밖 오른쪽으로 보이는 비각에는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동북포루와 용연. 왼쪽 위로 연무대(동장대)도 보인다.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용연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장안문 방향

 

 

북암문

수원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

암문은 깊숲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영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

1796년(정조20) 3월 27일 완공.

북암문. 수원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다.
용연과 방화수류정
용연
용연과 방화수류정
화홍문
화홍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북동포루

북동포루는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복동포루,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북동포루
걸어온 성곽길을 돌아보며...
출발했던 장안문으로 돌아오며 수원 화성 일부 구간 돌아보기 끝. (2022.09.28. 수)

지난 9월과 10월 초에 걸쳐 수원 화성을 자주 찾았었다.

보고 또 봐도 너무도 훌륭한 성곽이기에 보통 때도 찾는 횟수가 잦은 곳...

보면서 늘 바라고 느끼는 것은

수원 화성은 세계 어디에 견주어도 자부심을 가질만한 건축물이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오래도록 남아있기를,

그리고 우리나라가 오래오래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