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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세계/중국

[백두산+고구려 유적] 11. 집안(지안) 3 -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 국내성 성벽

국내성 성벽 (2024.07.06. 일)

 


 

12:42, 장군총에서 나와 국내성 성벽으로 이동한다.

버스로 그냥 지나간다는 걸 잠시 정차해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여행 일정에 나와 있는 코스였기에......

고구려 유적도 천지 못지 않은 또 한 축의 목적이었는데,

잠시 밟아라도 봐야지 그냥 지나가긴 아쉽지......

 

 

12:57, 비가 내려서인지 관심이 적은 건지 아무도 내리는 사람이 없었고

나 혼자서 내린 모양이다.

남편도 귀찮은지 안 내리겠단다.

백두산 여행에 고구려 유적을 포함한 코스를 선택했을 때

분명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 짐작했던 터~

막상 혼자 내리고 보니 부담이 된다.

대충 성곽만 얼른 찍고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이다.

 

첫 번째 도읍지졸본성(홀본성, 오녀산성, 홀승골성)으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운 후 약 40년간 수도였다

졸본성은 외적 방어에는 좋았으나

너무 좁은 지역이고 식량 확보가 어려운 곳이었다.

 

두 번째 도읍지국내성이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 때인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제 20대 장수왕 15년 때인 서기 427년까지 425년간 지속되었다.

평지성 수도 국내성 산성 수도 환도산성이라는 이중수도를 건설하여

외세의 침입에 대비했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오래 수도였던 곳이다.

집안 일대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으며

졸본에 비하면 농사짓기에도 알맞은 지역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방어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몇 장 찰칵 찍으며 나아간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0m 높이에 육박하던 성벽이

지금은 2~3m 정도의 높이만 남아있다.

국내성 석벽을 건축자재로 마구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훼손을 방치했고 역사 왜곡까지 더해져

지금의 모습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나마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정비한 게 아닌가 싶다.

 

 

 

집안박물관에서 본 자료에는 제법 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들었다.

돌로 된 성이라 잘만 관리하면 오래오래 보존이 되었을 텐데......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국내성 안내 설명을 만났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천천히 읽어 볼 시간은 없고 사진만 뚝딱 찍어왔다.

사진을 확대하여 읽어 보고 대충 풀어 본다.

"국내성(国內城, 國內城).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서기 3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425년간 지속.

성의 평면은 대략 사각형.

성 담장 주길이 2,741m.

성 담장 내·외 양벽에 장방형이나 방형 돌을 이용해서 쌓았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두었다.

원래 성문은 여섯 곳으로 남북에 각 하나씩, 동서에 각 둘씩.

민국 10년(1921년. 1902년 쑨원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해가 민국 1년)에 3문 중수,

동문은 집문문(輯文門), 서문은 안무문(安武門), 남문은 금강문(襟江門). 

국내성 지하에서 상당수의 고구려 유적이 발견됨.

국내성 성 북쪽 2.5km 위치에 환도산성이 있다.

두 성은 서로 번갈아 도성의 역할을 했다.

세계 왕도 건축 사상 부합식 왕도라는 신방식을 이루었다."

대충 이런 내용인 듯...

 

 

 

한 자리에서 이쪽 저쪽으로 뚝딱뚝딱~

'돌아가서 더 자세히 봐야지' 하면서......

 

 

국내성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통구성(通溝城)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두 번째 성곽. 도성.

 

국내성(國內城)은 졸본성(卒本城)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다.

한때 국내성이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통구성(通溝城)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성은 압록강 우안(右岸) 통구 분지의 서쪽 끝에 있는데,

몇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115도이다.

동쪽 성벽의 길이는 554.7m, 남쪽 성벽의 길이는 751.5m,

서쪽 성벽의 길이는 715.2m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그리고 성문은 여섯 곳이 있는데 남북에 각기 하나씩 있고 동서에 각기 둘씩 있었다.

성문에는 모두 옹문이 있었고, 동·북 두 면에 성지(城池)가 있었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터가 있으며,

4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또 이러한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土城)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국내성과 역시 고구려의 수도로 전해지는 환도성(丸都城)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는데,

그 중 국내성과 환도성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중국학자들과 일부 한국학자들은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최초의 수도인 졸본(卒本)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3년(유리왕 22)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부인하고,

209년(산상왕 13)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토대로 209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이 곳에서의 정도(定都) 기간에 대해서도『삼국사기』자체가 두 가지 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서기 3년 국내성천도부터 427년(장수왕 15) 평양천도(平壤遷都) 때까지라고 보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209년 환도성천도부터 427년 평양천도 때까지로 보는 견해이다.

특히 후자의 설은 고구려가 환도성천도 이후 평양천도 때까지 세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듯 이견이 분분하지만 서기 3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

비록 전란 등으로 일시적으로 왕이 다른 곳으로 이거(移居)한 적은 있었지만,

427년 평양천도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왼쪽 성벽을 따라 '집안조시(集安早市)'라고 안내된 곳까지 갔다가 돌아간다.

아침시장(새벽시장)이 열리는 곳인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집안조시' 글자 위에 고구려 와당이 붙어 있고

그 위에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 모형이 올려져 있다.

아래 단에는 고구려인이 수렵하는 모습(무용총 수렵도를 나타낸 듯)도 표현해 놓았네...

뒤편으로 조형물도 하나 보인다.

고구려의 도시임을 확인하는 자료들~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집안조시 표시 주변에는 큰 도로가 나 있다.

세월이 더 흐른 후에는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뒤편으로 가 보니 역시 '집안조시(集安早市)'라고 쓰인 안내.

돌아왔으니 오른쪽 안으로 성벽이 보인다.

더 안쪽으로는 고구려 유적공원이라는데, 거기까지는 가 보지 못 하네......

 

 

 

'집안조시' 내용을 보려고 좀 더 가까이 찍었다.

집안의 토산품인 인삼, 와인, 목이버섯, 꿀, 밤, 복숭아 등을 나타내었고,

A, B, C로 조시 구역까지 정해둔 걸 보면 시장이 제법 크게 열리는 모양이다.

시장 구경도 재미있는데, 시간적으로 어렵겠고......

 

 

 

집안 국내성 성벽 일부

더 돌아보지 못 하고 예서 돌아간다.

국내성이 일정에 있었건만 단 몇 분간의 걸음이라니 억울하다.

일행 분들이 돌아본다고 같이 내렸더라면

좀 더 자세히 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단 몇 분이지만 차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금 지겨웠을라나~

어쨌거나 혼자 다녀왔으니 차에 오르며 '죄송합니다'를 건넨다.

분명 일정에 있었던 장소이고

우리 역사의 흔적을 만나는 일이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버스에 올라 또 창밖으로 국내성 성벽을 바라본다.

저 계단을 올라 현재의 성 안의 모습까지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학창시절에 국내성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교수님이셨는데,

'국내(國內)'성은 우리말로 '집의 안(집안)'인데,

한자어 '집안(集安)'으로 맞춰진 것 아니겠느냐는...

우리말의 변천사까지 넣어 설명해주시던 게 생각나서

국내성을 꼭 보고 싶었었다.

사람이 모이니 편안한 곳~

집안이라고 해석해야겠다.

하긴 현재 우리나라의 지명 중에도

우리말 발음을 한자어로 끼워맞춰서 쓰는 게 많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뜻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경우 제 이름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고구려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집안에 와서

국내성을 이렇게 잠시 점만 찍고 가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더니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 변방의 역사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만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