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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안동] 묵계서원 / 카페 만휴정 / 보백당 종택

만휴정을 나와  길안천과 하리교를 건너 묵계서원으로 향합니다.

묵계서원은 응계 옥고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 선생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만휴정에서 1.2k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묵계종택(보백당종택)도 인근에 있고요.

걸어도 좋을 거리지만 시간을 줄이려 차로 이동합니다.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安東 黙溪書院 및 寶白堂 宗宅)

묵계서원은 응계 옥고(1382∼1436)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선생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숙종 13년(1687)에 지었으나,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는 마루를 깔고 양 옆에 온돌을 설치한 일반적인 형태를 보인다.

서원 왼쪽으로는 이 서원을 관리하는 ㅁ자형의 주사가 위치한다.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종택 안에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백당이 있다.

 

(문화재청 설명 자료)

 

묵계서원 입구 진덕문

 

 

 

묵계서원 안내 설명

 

묵계서원은 조선 초의 문신인 응고 옥고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덕행과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으나

1909년 다시 세울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1915년 강당을 고쳐 지었으며

199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서원 오른쪽에는 김계행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읍청루

2층의 당당한 누각이 묵계서원의 품격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단풍이 곱게 물든 때였죠...

 

 

잠시 묵계서원을 휘익 돌아본 후 카페 만휴정에 들릅니다.

카페 운영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잠시 쉬어가려고요.

 

 

카페 만휴정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며 잠시 쉼의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묵계서원에 들렀더니 주위가 어둑해졌고

가을 행사 준비 중이었습니다.

묵계서원 동재(극기재), 읍청루, 카페 만휴정

그리 추운 때는 아니었지만 저녁이다 보니

손님 맞이로 서원 마당에 난로가 설치되었습니다.

 

 

묵계서원 동재(극기재)

서재는 복원되지 않았네요.

 

 

묵계서원에서 바라본 카페 만휴정.

서원 관리사(주사, 廚舍)였던 곳이랍니다.

ㅁ자형 구조입니다.

 

 

묵계서원 강당 (입교당)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

가운데는 마루를 깔고 양 옆에 온돌을 설치한 구조입니다.

 

 

묵계서원 강당(입교당)

가을 행사 준비 중으로 입교당에도 난로를 설치했네요.

 

 

사당 입구 삼문

 

 

사당(청덕사)

응계 옥고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 선생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응계 옥고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야은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청백리로 이름나신 분이네요.

보백당 김계행 선생 역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긴 분이지요.

묵계서원은 청백리 선비들을 모신 서원이네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분들이십니다.

 

 

 

 

 

 

카페 만휴정

묵계서원 관리사인 주사(廚舍)는 창건 당시의 유일한 건물이며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건물입니다.

지금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네요.

묵계서원 앞에서 바라보아 왼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영업시간은 09:30~17:50(마지막 주문은 17:40까지)

 

 

 

 

 

 

 

 

차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아나갑니다.

 

 

 

보백당 종택 (寶白堂 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종택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가리킨다.

보백당 종택은 조선 시대 문신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의 종택이다.

김계행은 소산마을에 처음 정착한 김삼근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로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지냈다.

대사간일 때 연산군의 폭정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자

안동으로 돌아와 소산리 사제에 보백당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보백당이라는 명칭은 김계행의 생활 철학인 시구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

에서 따온 것이다.

김계행은 평소 이곳의 풍경을 즐겨 자주 방문하였다.

성종 6년(1475) 장남에게 이곳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1501년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은거하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묵계(黙溪)라고 하였다.

종택은 풍산읍 상리마을에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불타면서 근처의 고란리로 옮겼다가

1800년대 후반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종택은 중심이 되는 집인 ㅁ자형의 정침, 사당, 사랑채인 보백당,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종택의 정침 일부가 불탔으나,

1958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안내 설명 자료)

 

카페 만휴정에서 좀 쉬었다 나오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요.

지금은 숙박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보백당 종택.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어둡지만 잠시 들러 봅니다.

 

 

대문 입구에 '謹', '愼' 글자가 씌어 있습니다.

김계행 선생의 유훈인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愼 待人忠厚)'에서 따온 모양입니다.

 

 

몸채
용계당
사당
보백당

 

종택의 사랑채인 보백당

 

 

'보백당'이라는 명칭은 김계행의 생활 철학인 

“吾家無寶物 物惟淸(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청백리의 표상다운 말씀이네요.

감동을 받고 나옵니다.

(2023.11.04.토)

 

 

 

* 안동 여정~ 지금까지 친정어머님 생신을 앞두고 내려가면서 둘러본 곳들이었습니다.

이날 밤에 시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요양병원의 전화를 받았고,

시어머님께서는 갑자기 찾아온 급성폐렴으로 2023.11.05. 0시 43분에 운명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