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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대구 달성] 묘골마을 / 사육신을 모신 사당, 육신사 (숭정사)

묘골마을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이른바 묘골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입니다.

풍수적으로는 묘골을 '용이 몸을 틀어 꼬리를 바라보는 형'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네요.

산으로 둘러싸여 눈에 띄지 않다가 가까이에 와서야 묘하게 보이는 마을이라 묘골,

토끼(卯)굴을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지형이라 묘골,

마을터가 묘(竗)해서 묘골,

마을 유래가 묘(妙)해서 묘골,

하빈사, 낙빈서원, 육신사 사당이 있어 사당 묘(廟) 자를 써서 묘골~

'묘골'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가 참 다양하네요.

 

박팽년은 충청도 회덕현(현 대전 동구 대덕구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출신입니다.

사육신 사건 때 멸문지화를 당하여 절손의 위기를 맞았으나

천운인지 둘째 아들 박순의 처 성주이씨가 유복자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성주이씨는 친정이 있는 대구의 관비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대구로 내려오게 되며

아들(박비, 후일 박일산)을 출산하여 남몰래 키우게 됩니다.

이후 이 분이 묘골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천박씨의 시조는 승주(순천) 출신이지만

순천박씨를 묘골박씨라고도 한답니다.

 

참 오랜만에 묘골마을 육신사를 방문해 봅니다.

 

 

육신사 가까이에 이르면 여름날에는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서 반긴답니다.

'충절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문을 지납니다.

 

 

사육신기념관과 묘운 카페

묘골 마을에 들어서면 사육신기념관이 보이고요.

이어져 있는 건물이 묘운 카페네요.

 

 

사육신기념관

육신사 건립 경위, 박팽년 선생 초상과 교지, 묘골마을 모습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육신사를 처음 방문한다면 이 기념관부터 보고 가면 도움이 많이 되겠지요.

문이 닫혀 있어 패스해야겠습니다.

전에 둘러본 곳이니 대충 내용은 아니까 아쉬움이 적네요.

 

 

묘골마을에는 큰 한옥들이 참 많습니다.

처음 가 보시는 분들은 놀랄 정도지요.

묘골마을의 한옥은 현재 30호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묘운 카페 앞에서부터 큰 규모의 한옥들 옆을 지나

가장 안쪽의 육신사 앞까지 올라왔습니다.

 

 

 

육신사(六臣祠)

육신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사육신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목숨을 잃은 여섯 분 충신을 말합니다.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하위지가 그분들입니다.

이분들 중 다섯 분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해 손이 끊겼으나

오직 박팽년의 유복손만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박팽년의 자손들이 육신사에서 사육신을 기리는 제를 지내고 있고요.

육신사 입구 외삼문입니다.

'六臣祠'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육신사 안내 설명

 

 

육신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삼가헌고택 윗쪽의 낙빈서원(1982년 복원).

원래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하빈사가 있던 곳...

처음 사당을 지을 때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삿날에

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

나머지 분들의 음식도 장만하여 함께 제사지냈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고 하네요.

 

 

 

송덕사(頌德辭)

말 그대로 덕을 칭송하는 글이네요.

이곳 육신사 자리는 박팽년의 17대 손인 취운 박노익(1888-1958) 선생의 생가터랍니다.

박준규(1925-2014) 전 국회의장이 이분의 아들이고요. 

취운 박노익 선생은 경술국치와 일제암흑기로부터 광복에 이르는 동안

민족의 개화와 번영, 후예들의 중흥을 위해 평생 헌신한 선각자라고 합니다.

후대에도 충정공(박팽년)의 충절을 이어받았네요. 

현재 육신사 경역은 후세들을 위하여 사육신의 유덕을 기리겠다는

취운공의 생전의 뜻이 모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아드님이신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고인의 뜻을 받들어 육신사 주변 일대의 8만여평을 

재단법인 육신사 보존회 기본 재산으로 기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취운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1995년 3월 15일 순천박씨 충정공파 종친회) 

 

 

육신사 외삼문을 들어섭니다.

안쪽으로는 '절의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외삼문을 지나 홍살문을 향해 올라갑니다.

왼쪽에는 아주 작은 연지가 있습니다.

이 부지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기증한 땅이라는 얘기지요.

 

 

홍살문 앞에서 외삼문을 바라봅니다.

작은 연지가 있네요.

 

 

육선생 사적비

홍살문을 지나면 1979년 12월 1일에 건립된 육선생 사적비를 만납니다.

사육신의 이름과 행적이 이 육각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로 박팽년 선생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좌우로 성삼문 선생과 유응부 선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요.

끝까지 충성심을 잃지 않았던 사육신의 기개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육선생 사적비를 한 바퀴 돌아봅니다.

이개성삼문 선생 사적비

 

 

가운데 유성원, 좌우로 하위지, 이개 선생 사적비.

오른쪽 계단 아래로 보이는 우물 옆에 '박준규(제 13, 14, 15대 국회의장) 집터'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육신사 주변 일대의 8만여 평을 기증하였다니 대단한 일이고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집안으로 보아서도 국가적으로 보아서도 사육신의 충절을 더 높이 살 수 있으니까요.

 

 

유응부, 하위지 선생 유적비.

왼쪽 가운데 우물 자리에 박준규 전 국회의장 집터 표시.

우물 옆 계단을 오르면 박팽년 선생의 부친을 모신 사당인 충의사가 있습니다.

오른쪽 계단 위에는 숭정사(육신사).

 

 

숭정사 오른쪽 담장 아래에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박준규 국회의장 휘호.

앞쪽은 1981년에 세운 육신사 건립비입니다.

 

 

육신사(숭정사) 내삼문인 성인문

이곳은 올라가지 못 하게 막아 놓았습니다.

평소에는 닫아 두나 봅니다.

오래 전에 순천박씨의 묘골 <고향 방문의 날>에 방문했을 때는 사당을 열었던데 말입니다.

참고로 사육신의 묘는 서울 노량진에 있습니다.

 

 

헌성방명록(獻誠芳名錄)이고요.

박정희, 최규하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장관, 각급 학교 교장, 시장, 군수 등을

역임한 분들의 이름이 보이네요.

 

 

문 닫힌 숭정사(崇正祠)입니다.

마음 속으로 사육신의 충절을 기려 봅니다. 

 

 

2011년에 방문했을 때의 숭정사 모습입니다. (2011.05.08. 일)

안을 들여다보긴 했지만 방문객이 많아서 내부 사진은 못 찍었네요.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홍살문쪽을 바라보며 사진 뒤편의 충의사로 올라갑니다.

 

 

충의사

박팽년 선생의 부친(충민공 한석당 박중림)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원래 사육신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으나현재는 따로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박중림은 아들 박팽년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고,

사육신과 함께 잡혀 능지처사(능지처참)당하였습니다.

아들인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당해 옥사하였지요.

부자의 충절이 눈물겹습니다.

그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 안타까움은 말할 수 없지요...

2011년 방문 시에는 단청도 없었는데,

이제 제법 자리잡힌 모습입니다.

 

 

충의사는 박팽년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 한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탁자 아래에 박중림 선생에 대한 책이 놓여 있네요.

 

 

충민공 한석당 박선생 유적비

박팽년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 유적비도 돌아봅니다.

 

 

담장 너머로 동네도 바라보네요.

오른쪽 위로는 팔각정 가는 길이 있습니다.

 

 

 

충의사에서 내려와 태고정에도 들러 봅니다.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지요.

 

 

태고정

백팽년의 손자(유복손)인 박일산이 건립한 정자로

원래 종가 안에 붙어 있던 별당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었다고 하네요.

* 박일산: 박팽년의 둘째 아들인 박순의 아들(유복자, 박팽년의 손자).

                  사육신 사건 때 박팽년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서 뱃속에 있어 죽임을 면했지요.

                  사육신의 자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이지요.

                  이후 순천박씨 가문에서 사육신 모두의 제를 지내게 된 거고요...

 

 

독특한 지붕 구조를 보이는 태고정입니다.

 

태고정(太古亭), 일시루(一是樓)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일시루 현판은 안평대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하네요.

건물 구조가 독특해서 기억하기 쉽습니다.

 

 

태고정에는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뒤에 이곳에 온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습니다.

 

 

태고정 옆의 이 건물은 제택이라고 하네요.

살림집 건물인가 봅니다.

 

 

태고정 뒤편에서 바라본 숭정사입니다.

 

 

태고정 아래로 보이는 건물은 숭절당(崇節堂), 동재, 서재가 있는 곳이고요.

상사화가 곱게 피어 있을 때였네요.

 

 

태고정 아래의 숭절당은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숭절당은 숭정사에서 열리는 제사 때 제구를 관리하는 전사청의 역할을 하고

제관들의 임시 숙소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육신사에서 나와 담 너머로 육신사를 바라본 후

담 따라 난 길을 올라가 봅니다.

 

 

육신사 옆 골목길, 숭절당.

이 길 따라 올라가면 주차 공간이 있습니다.

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습니다.

 

 

숭절당 주변을 돌아나와 내려가는 길에 도곡재에 들릅니다.

 

 

도곡재

정조 2년에 대사성을 지낸 서정공 박문현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선생의 호를 따서 도곡재로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도곡재

도곡 박종우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평생 지은 글을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후 스스로 숭정처사라고 부르며 평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네요. 

 

 

도곡재

원래는 앞면 4칸, 옆면 1칸.

후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으로 퇴칸 1칸을 달아내어 대청을 넓힌 모습입니다.

누의 형태처럼 보이네요.

 

 

능소화, 목수국 등도 예쁘게 피어서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하네요.

 

 

능소화가 발목을 잡습니다.

 

 

올 여름에 묘골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아주 더운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갔으니 동네를 좀 더 돌아보았지요.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 생가터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유년시절 여사의 관상을 본 한 스님이

"왕비가 아니면 거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네요.

정말 관상 잘 보는 스님이네요. ㅎㅎ...

 

한의원 등 큰 한옥들이 여러 채 있는 묘골마을입니다.

동네에 들어서면 한눈에 보아도 세도당당한 터임을 알 수 있지요.

예전에는 더 많은 집들이 있었다니 수많은 집들은 어디 가고

지금은 30호 정도라니 그게 요즘 농촌의 현실입니다.

실제 사람이 사는 집은 몇 채 안 된다고 하네요.

나의 고향 한개도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보존되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거나 달성 하빈을 방문한다면 육신사가 있는 묘골마을은 꼭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인근의 삼가헌고택과 낙빈서원, 하목정을 같이 돌아보면 좋겠지요.

 

(방문일: 2023.08.01.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