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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광주 전라

23 [전남 영광] 영광 도동리 석장승,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조운 생가

영광순교자기념성당 (2021.07.23.금)


 

법성포에서 영광성당으로 향한다.

서해안 따라 바로 올라올 생각을 하고 백수해안도로를 거쳐 법성포로 왔었는데,

생각을 바꾸었네.

천주교인 순교지는 영광의 4대 종교 문화유적지 중 하나.

 

* 영광의 4대 종교 문화유적지 

-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 원불교 영산성지

- 기독교인 순교지

- 천주교인 순교지 

전에 돌아본 곳들이지만 다시 돌아보고 싶은 곳들...

 

 

영광읍에 들어서서 영광성당을 찾아가는 길~

그리 먼 길은 아니다.

인근에 도동리 석장승이 있어 잠시 만나 본다.

 

영광 도동리 석장승

도동리 당산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장승 .

마을의 수문신, 수호신 등의 구실을 하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순조 32년(1832) 세워짐.

 

 

할머니 장생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몸통이 사다리꼴로 올라가다가 머리부분에 와서 사각꼴로 깎였다.

두께 18m의 널돌을 사용하여,

두터운 할아버지 장생에 비해 날씬한 모습이다.

눈과 코는 둥글고 입은 기형적으로 크며,

이빨은 요철(凹凸) 모양으로 파놓아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다.

‘서방대장도광 12년’이라 새긴 것으로 보아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북쪽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장생은 대강 다듬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우직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동그란 안경을 쓴 듯한 눈, 동그란 코, 초승달 같은 입술, 턱 아래 두줄의 수염 등

소박한 시골 할아버지의 얼굴 모습이다.

앞면에는 ‘동방대장’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할아버지 장생과 할머니 장생 사이에는 거칠게 다듬은 원통형 돌이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애기장생’또는 ‘말막뚝이’라고도 한다.

이 장생들은 원래 길쪽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으나

도로정비 관계로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출처: 문화재청)

 

 

영광성당 인근 거리에 안심가로등길이 조성되어 있네.

한국수력원자력(주)에서 영광군민의 안전을 위해 조성했다는......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우리나라 가톨릭의 시작은 이승훈 베드로가 처음 세레성사를 받은 1784년으로 본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걸 보면

한국 천주교의 전래를 1784년으로 보는 게 옳겠다.

 

17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후 17년째 되는 1801년에 영광 지역에서 순교자가 나왔다.

영광 지역 신자 중 신유박해(1801)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가 영광에서 참수형  순교,

병인박해(1866~1873) 때 김치명(1867)은 공주에서 교수형 순교,

유문보 바오로(1872)는 나주감옥 순교.

이우집과 최일안은 신유박해(1801) 때 전주에서 처형당함. 

 

영광은 초기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교우촌이 신유박해(1801년경)시대에

호남 지역에서 전주, 고산에 이어 세 번째로 크게 형성된 곳.

이후 계속된 박해로 인해 신앙 선조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1937년 10월에 영광본당 설립,

6.25 때 공산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함평 관할 공소,

1965년 5월 4일 영광본당으로 재승격.

2010년 9월 10일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지정.

2013년 7월 27일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신축 기공식.

2014년 6월 28일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축성식.

2017년 5월 13일(본당 설립 80주년 때) 영광순교자기념성당 기념관 축성식.

(출처: 영광성당 카페 외)

영광성당 입구
푸르른 수목이 싱그러움을 더하네.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순교자 기념문 설명
네 개의 기둥은 영광의 순교자 4인(이화백, 양반오씨, 김치명, 유문보) 상징. 가운데 위 십자 순교자상은 조선시대 죄인 씌우는 칼+십자가 조합한 형상
순례자 쉼터
순례자 쉼터 앞에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조형물
영광성당(영광순교자기념성당)

소성당 입구
닫혀 있어서 내부는 보지 못 함.

 

성당 앞에서 순교자 기념문을 바라보며 위대한 종교의 힘을 생각해 본다.
순교자 추모비(이화백, 유문부, 김치명, 오씨양반)
이해인 수녀님 기도 시비 '핏빛 사랑으로'
성모상
시작기도를 시작으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며 성당 한 바퀴 끝.

 

 

 

성당 뒤편으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쓰러져가는 초라한 집 앞에 다다른다.

영광의 시조시인 조운 생가이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그도 그럴 것이 월북 작가라 모두에게서 잊혀진 이름이니...

 

 

조운 생가

조운(曺雲 1900~?) : 본명 조주현(曺柱鉉).

영광 출생. 시조시인. 

일제치하에서 영광의 교육과 문화 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영광의 3·1운동 주도적 역할.

만주 피신 중 단편소설 <탈출기>의 작가 서해 최학송을 만남.

나중에 최서해는 조운과 처남매부 관계가 된다.

1921년 <동아일보>에 첫 작품 <불살너주오> 발표.

19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넘을 때> 등 자유시 3편을 발표하여 문단 데뷔.

1925년 동료 교사 박화성을 춘원에게 주선하여 <조선문단> 작가 등단에 도움.

작품으로 <석류>, <채송화>, <선죽교>,  <파초> 등.

작품집 <구룡폭포>, <조운문학전집>, <조운시조집>(1947) 등.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에서는 공직을 역임한 모양이고

북한사회에서 문화계의 큰별로 추앙받은 모양.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었으나

아직은 조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월북 작가인 데다가 북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니......

쓰러져가는 초라한 집이 그 상황을 알려주네.

월북 후 선생의 질녀뻘 되는 이가 이 생가에 살다가 경매에 부쳐졌는데,

영광의 향토시인 장진기님이 낙찰 받아 그나마 남아있는 거란다.

 

조운 선생 생가 앞의 '파초' 시비. 담을 뒤덮은 담쟁이덩굴.

 

파초 / 조운 作

 

펴이어도

펴이어도 다 못 펴고

남은 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바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지고.

 

처음 보는 시.

월북작가라 그의 이름을 들어보는 것도 처음.

위 시는 끝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시란다.

작가가 일제치하에서 교육과 문화, 3·1운동에 앞장선 분이라니

조국애가 투철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운 생가, 조운문학동산이라고 쓰여 있다.

돌보지 않은 초라한 집~

나무들만 무성하게 자란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석류 /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가슴

 

밖에서 보아도 을씨년스럽지만

문을 들어서서 보니 다 쓰러져가는 형상이다.

금방이라도 추녀끝 물받이가 무너져내리기라도 할 듯...

붉은 배롱나무꽃만이 옛 주인을 그리워하듯 수줍게 피어 있었다.

더 이상 머무르기도 어려워서 후딱 돌아나온다.

후대에는 조운 시인에 대해 또 어떻게 평가할지~~~

(2021.07.23.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