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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서울 종로]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이 있었던 터, 경희궁지

[서울 종로]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이 있었던 터, 경희궁지

 

덕수궁길을 걷고 경희궁지쪽으로 이동하였다.

광해군 때 건립된 경희궁은 일제시대에 헐리는 비운을 겪었고,

오래도록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일부나마 새로 복원이 되었다.

* 조선의 5대 궁궐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문 

 

 

 

 

경희궁지 (慶熙宮址)

 

사적  제271호

원종(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현재 경희궁지로 이전 복원)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문화재청)

 

 

경희궁 답사의 시작, 옛 흥화문터와 금천교

가운데의 구세군회관 건물이 경희궁의 정문인 옛 흥화문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 흥화문은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경희궁 화문터와 금천교

앞쪽의 석물들은 운현궁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금천교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안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인 돌다리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상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경희궁 조성 당시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본이 매몰시켰지만,

2001년에 복원했다.

 

 

두 개의 아치로 구성된 경희궁 금천교

금천교가 복원이 되었지만 그 옛날의 금천은 어디로 갔나......

 

 

경희궁 금천교 구역

지금은 금천교 안쪽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래의 궁궐대로 복원했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원래 위치에서 100m 서쪽에 복원된 경희궁 흥화문을 만난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

 

 

경희궁흥화문 (慶熙宮 興化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원래는 현재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1932년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장충단 공원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떼어 갔고,

이후 영빈관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쓰였다.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 사업 목적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 앞에 붙어 있는 경희궁지 설명판도 한 번 읽어 본다.

 

 

흥화문 안으로 들어서서 돌아본 모습

 

 

한동안은 경희궁지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1946~1980)

 

 

지금 그곳에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대한민국서예문인화원로총연합회전이 열리고 있었지만 통과하고...

복원된 궁궐 영역으로 가 보기로 한다.

 

 

경희궁은 광해군 재위 시에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했던......

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어서

1760년(영조 때)에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해 서궐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해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이후 1910년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궁궐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반으로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는 경희궁지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해

 2002년부터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더 안쪽으로 숭정문이 보인다.

 

광해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왕이다.

자신의 정통성 문제, 붕당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그래서 경희궁 건설에 더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광해군은 경희궁에 들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왕위는 원 집터의 주인인 정원군의 장남인 인조에게 돌아간 것...   

왕이 나는 터가 맞긴 맞나 보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앞에 세워진 숭정문을 만난다.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슬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경희궁...

조선의 궁궐 중 경희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던 비운의 궁이다.

 

 

경희궁지 설명도 읽어 본다.

 

 

숭정문 앞에서 걸어온 쪽을 바라본 모습.

오른쪽 흰 건물이 현재의 서울시립경희궁박물관이다.

 

 

숭정문을 들어서서 복원된 숭정전을 만난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다.

정조 이산이 이곳 숭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776.3.10 제22대 임금 정조 즉위.

 

즉위 전 정조 이산의 동궁일기를 보면

세손 시절의 어렵고 무서웠던 이야기들이 잘 나타나 있다.

노론 세력들은 이산을 세손으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는 즉위하는 날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알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를 궁지로 내몰았던 노론에게는 무시무시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적절한 회유와 강압으로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어나갔다.

노론의 영수였던 심환지와의 비밀 편지가 잘 말해준다.

진정한 개혁 군주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경종, 헌종도 숭정전에서 즉위하였단다.

 

 

숭정전

귀퉁이에 방화수통인 드므와 액운을 방지해 준다는 부간주가 놓여 있다.

 

 

답도.

석물 일부는 남아있던 것을 이용해서 복원했지만

보충한 것이 많아 보인다.

세월이 더 흘러야 좀 자연스러워지겠지...

 

 

숭정전 설명도 읽어 보고...

 

 

숭정전 내부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왕좌 뒤에는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 병풍이 쳐져 있다.

 

 

숭정전 내부 천장의 모습

 

 

숭정전에는 궁중 생활에 쓰이던 물건들이 복원 전시되어 있다.

 

 

경희궁숭정전 (慶熙宮 崇政殿)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

광해군 10년(1618)에 지어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공식적인 행사를 하던 곳이다.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1926년 조계사로 옮겨 세워졌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가 불교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게 변형되어 있다.

(문화재청)

원래의 경희궁 숭정전(동국대학교 정각원)

* 현재 위치 : 서울 중구 필동3가 26번지(동국대학교)

 

 

숭정전 앞에서 숭정문을 바라보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지도 않은 세월을 두고

너무도 많은 변화를 보인 경희궁... 

몇몇 관람객만이 지나간 역사를 잠시나마 어루만진다.

 

 

자정문

숭정전 뒷편으로 자정전으로 통하는 자정문이 나온다.

안쪽으로 자정전이 보인다.

 

 

자정전

자정전에 대하여...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이 복원되어 있다.

편전이었지만 숙종 승하 때에는 빈전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은 경덕궁(경희궁)에서 태어나고 경덕궁에서 승하했다.

승하한 왕의 장례는 6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왕릉을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찬궁(임금의 관인 재궁을 두는 상자)을 놓아두었던 자정전 내부

 

 

자정전 옆의 회랑

 

 

자정전 뒷편

 

 

자정전 뒷편에서 서암을 바라본 모습

 

 

자정전 옆에서 바라본 풍경

 

 

자정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자정전 앞 남쪽 작은 방에서 세자였던 경종이 숙종의 염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자정전

 

 

서암과 태령전 가는 길에...

 

 

자정전을 나와 태령전쪽으로 이동하였다.

태령전 뒷편의 서암 주변을 만난다.

 

 

서암

 

 

태령전 뒷편의 서암 주변

 

 

서암(瑞巖:상서로운 바위)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바위 속에 샘이 있다.

정말 신비롭긴 하다.

 

 

서암은 원래 왕암으로 불리었고,

그 이름으로 하여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숙종 때 '瑞巖'으로 이름을 바꾸고,

숙종이 사방석에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단다.

그러나 지금 그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암에서 바라본 풍경

왼쪽 가장 뒷편이 자정전, 가장 오른편으로 조금 보이는 건물이 태령전이다.

 

 

서암쪽에서 본 태령전 뒷모습

 

 

태령전 옆에서 본 자정전쪽 모습

 

 

태령전

영조의 어진이 모셔진 태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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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진

 

 

태령전에 대하여 읽어 보고...

 

 

태령전을 다시 바라본다.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으로.

선원전의 역할을 한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다.

그러나 영조의 초상화가 그려지자 1744년에 중수해 보관했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했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단다.



 

조선 역사상 52년이라는 가장 긴 재위 기간을 가진 왕, 영조...

어머니의 천한 신분으로 해서 은근히 멸시를 받기도 했었지만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결국 조선 제21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탕평책으로 당쟁 완화에 힘쓴 점 등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아들인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죽음으로 몰게 된 아픈 사연도 가지게 됐다.

 

 

태령전

특히 영조 재임 당시에 어진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태령전 앞마당과 문

 

 

태령전 앞마당

 

 

태령전까지 돌아본 후 다시 숭정전 옆 회랑을 통해 나가게 된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다시 바라보며...

 

 

숭정전을 둘러싼 회랑

 

 

생각보다 오랜 기간 조선의 임금들이 머물렀던 경희궁...

 

 

황학정 (黃鶴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호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이다.

고종 광무 2년(1898) 지어졌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원래 이 자리는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오사정이란 도성 안 서쪽에 세워진 다섯 개의 활터에 세워진 정자로,

옥동의 등룡정·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누상동의 풍소정·필운동의 등과정이 그것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경희궁에 있던 궁술 연습 정자인 황학정은 현재 사직동으로 옮겨져 있다.

* 위치 : 서울 종로구 사직로9길 15-32 (사직동)

 

 

 

서울역사박물관쪽으로 가다가 만난 고목.

궁궐 한켠에 고목이 된 느티나무가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한많은 궁궐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또 하나의 아픈 흔적, 일제 방공호

고목 옆을 지나 서울역사박물관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아래로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일제가 경희궁 내에 설치한 방공호의 흔적이다.

이곳 주위는 왕과 왕비의 침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제2차대전을 맞아 발악을 한 일제는 우리나라의 물자와 인력을 약탈했고

궁궐 자리에 이런 야만적인 일까지 저질렀다.

보기에 참 흉물스러워 보인다.

이곳이 정녕 궁궐이었다는 말인지~~~

 

 

경희궁을 돌아보면서 궁 건설에 심혈을 기울인 광해군을 생각했고,

숭정전 앞마당에서는 어렵사리 왕의 자리에 오른 정조의 즉위 장면을 생각했으며,

자정전 앞에서는 숙종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영조가 재임 시에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는 태령전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 외에 있었을 그 많던 건물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지~~~

궁궐의 없어진 여러 건물들을 차치하고라도

저 방공호를 보라!

궁궐을 허물고 방공호까지 건설한 일제의 만행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는 참 아픈 일이 많아서 슬프다.

더 잘 복원된 경희궁의 모습을 기대하며......

 

 

2015.05.23(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