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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세계/일본

일본 대마도 금석성과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일본 대마도 금석성(가네이시죠)과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청수산 아래 금석성은

옛날 대마도주가 거처했다는 곳으로

현재  노문(야쿠라문)이 복원되어 있고

그 안에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금석성 노문 가는 길

 

입구 왼쪽에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를 알려주는 팻말이 서 있다.

 

바깥쪽에서 본 금석성 노문의 모습

 

일본 건축물은 날렵하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금석성 터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쪽에서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본 옆 모습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성문이란다.

금석성 노문(야쿠라문)을 안쪽에서 본 모습

 

산을 올려다보면 청수산성이 보인다.

 

이왕조(조선)와 대마도 종가(소가문)의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다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곳이라는 표지석...

대마도에 13개가 있다고 한다.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비운의 황녀로 불리는 덕혜옹주...

그녀는 고종의 고명딸로 후궁인 양귀인에게서 태어났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에 의해 13세 어린 나이에 동경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931년 스무살의 나이에 대마도주의 손이었던 종무지와 강제 결혼하고 그 이듬해에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장성한 딸이 실종되어 의문을 죽음을 맞았고 덕혜옹주는 더욱더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비참한 일생을 살게 된다. 조선일보 김을한 기자(고종이 그녀와 약혼시키려 했던 김장한의 동생)가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감금 사실을 폭로하여 덕혜옹주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고, 1962년 박정희에 의해 귀국하게 되어 7년간 병원생활을 했으며 이후 창덕궁 수강재(낙선재와 연결된 구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일생을 마감(1989년)한 비운의 황녀이다.

덕혜옹주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도 시대의 희생자들인 셈... 

 

그녀가 결혼하던 해에 딱 한 번 대마도를 방문했는데, 그 당시 대마도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이 하치만궁 경내에 결혼봉축기념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1955년에 종무지와 덕혜옹주가 이혼하자 대마도 사람들이 비를 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쳤으나 이후 대마도-부산 직항 선박 취항으로 한국 관광객이 모여들자 이곳에 되세운 것이다.

 

 

 

 

 

먼나무

 

 

2012.02.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