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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세계/일본

일본 대마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조선통신사비, 대마현립 역사민속자료관

일본 대마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조선통신사비, 대마 역사자료관

 

하치만구 신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마 역사자료관이 있다.

자료관 앞에는 고려문, 성신지교린 비, 조선통신사 비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일본의 성은 우리나라와 달리 성벽 모서리를 경사지게 만든 것이 특징.

왜성은 전시에 성주(장군)와 그 가족만 살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고려문

 

제 21대 대마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이라고 한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단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며 소화 때 이 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고려문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신지교린 비

 

 

 

문 안쪽에서 본 모습

 

성신지교린(우삼방주 선생 현창비 )

우삼방주(=아메노모리슈)가 조선과의 교역에 있어 대마도주가 취할 바를 알린 내용으로, 조선을 대할 때 '진실로 대하면서 믿고 교류해야 한다'는 <성신지교린>의 관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부산 초량 왜관에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대마도에 한국어 학교를 세웠다. 

 

조선국통신사지비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통신사절단 467명을 시작으로 1811년까지 총 12회의 사절단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300~500명에 달하였다. 비는 1607~1811년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조선 통신사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는 통신사, 후기는 조선통신사라고 일컫는다.

 

조선 전기의 통신사 중 1590년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에서는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파견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사와 부사는 조정에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 된다. 정사 황윤길은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부사 김성일은 조정과 백성의 동요를 이유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이유 있는 의견이었지만... 어쨌든 이후의 역사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파묻히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잠시 외교관계가 끊겼다가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다시 쓰시마번을 통해 재개되었다.

조선 후기 통신사는 1607년 국교 회복을 시작으로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중 조·일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양국의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 조선에서는 정사, 부사, 종사관인 세 사신을 중심으로 300~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파견되었으며 이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일본 측에서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마지막 조선통신사는 에도까지 가지 못하고 이곳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가게 된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각 번에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이유, 일본의 발전으로 조선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이유, 에도막부의 대외적 개방 압력이 부담이 되었던 것...

  

사진 쪽으로 조선국통신사지비가 보이고 오른쪽 아래로 고려문 표지석이 보인다. 

길을 돌아 올라가면 대마현립 역사민속자료관이 나온다.

 

대마현립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들어서니 덕혜옹주의 남편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예전 대마도주가 전 일본 271 중 43위라는 서열표도 보이고...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의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 기념물도 보관되어 있다.

조선과의 교역에 있어 <성신지교린>으로 대해야 한다는 아메노모리 호슈 초상화도 보이고...

자료관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구역이었다.

월요일은 휴관일이라 다음날인 화요일에 본 내용이다. 

 

 

제2차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한 배 주환, 그 조난자 위령탑이 대마현립 역사민속자료관 옆에 서 있다. 

 

2012.02.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