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세계/일본

일본 대마도 팔번궁(하치만구) 신사

일본 대마도 팔번궁(하치만구) 신사

 

나카라이 토스이 문학관을 나와 팔번궁 신사로 향하였다.

날씨는 겨울 날씨답지 않게 좋았다.

그래서인지 걸어서 하는 답사길이 오히려 상큼하였다.

 

팔번궁(하치만구) 신사는 어부와 병사들을 보호하는 신사라고 한다.

일본 전국의 팔번궁 신사는 약 38,000여 개라고 하니 그 수가 엄청나다.

이즈하라의 팔번궁 신사는 서기 906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이 신사에 모신 신은 5신이란다.

이 신사에는 대마도주 종가로부터 헌상된 귀중품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보물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는 대마도 19대 도주의 부인과 아들을 모신 마리아 신사가 같이 있다.

 

팔번궁 신사 입구

 

 

 

신사 입구에는 고마이누라고 하는 개상이 지키고 있다.

 

고마이누는 고려 개라는 뜻이란다.

 

왼쪽의 개상은 입을 다물고 있고

 

오른쪽의 개상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본다.

 

여러 개의 계단을 거쳐

 

문으로 들어선다.

 

문 안쪽의 상

 

신사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이런 비석과 탑이 보인다.  

 

이어지는 왼쪽 비석군.

 

보수공사 기부자 금액과 이름이 적힌...

 

신사 참배시 물을 사용하는 곳

 

기원지도 많이 걸려 있다.

 

본당

 

안쪽 통행금지 구역

 

안쪽으로 보물전이 보인다.

 

보물전은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어른 300엔이라던가...

 

 

 

마리아 신사 

 

마리아 신사는 19대 대마 도주의 부인과 아들을 모신 곳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장녀를 말하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족 모두 카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15세에 정략적으로 대마도주 종의지(소 요시토시, 타리오)의 부인이 되었다.

마리아의 아버지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때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 싸움(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형을 당한다. 이에 고니시의 사위 종의지(쇼 요시토시)는 대마 주민의 안전을 위해 부인인 마리아와 이혼하고 나가사키로 내친다. 마리아는 거기서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 권력 싸움에 희생된 그녀를 위해 <이마미야>, 그녀의 아들을 위해 <와카미야>로 이 신사에 각각 입산시킨 후 제사를 모시다가 후에 천신신사에 합사되었다고 한다.

 

마리아 신사

 

아름드리 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주는 듯...

 

소서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을 모신 신사

 

 

마리아 신사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소서 부인은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장녀로 1590년 15세에 종의지의 부인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소서 가문이 멸하자 1601년 10월에 나가사키로 내쳐졌고

그 후 신앙생활을 하며 5년을 더 살았다.

1619년, 그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마미야>, 그녀의 아들을 위해 <와카미야>로 이 신사에 각각 입산시킨 후 제사를 모시다가 후에 천신신사에 합사되었다.'

 

원혼을 달래려는 듯 오랜 기간 있어온 나무로 보인다.

마리아 신사와 천신 신사

 

천신 신사

 

 

마리아 신사에서 내려가는 길...

 

2012.02.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