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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성주 정헌공 응와 이선생 신도비

정헌공 응와 이선생 신도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입구에 있는 이 비는

이원조(1792~1871)의 신도비다.

그의 호는 응와, 시호는 정헌이며, 본관은 성산(星山).

사도세자 구명에 앞장섰던 돈재 이석문의 증손자이다. 

증조부 돈재는 선전관 근무 시절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구명하다가 파직된 후

낙향하여 북쪽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벼슬하러 나가지 않은 충절의 선비로

흔히 북비공(北扉公)으로 칭한다.

선생은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간원 정언, 대사간, 좌승지, 병조참판, 공조판서,

강릉부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과 저술을 남겼다. 

응와는 10세에 이미 사서(四書)와 시·서를 통하였고

12세 때는 부형의 글을 능히 대필할 정도로 모든 문체에 통달하였다.

18세에 대과에 급제하자 부친이 '소년으로 대과에 오름을 경계'하라고 하여

이 가르침을 따랐고 23세 때 입재 정종로의 제자가 되었다.

26세에 전적(典籍)의 벼슬을 시작하였고,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퇴계 학통의 정맥을 잇는 입재 정종로와 정재 류치명 학문의 요지를 얻었고

당시 학계 쟁점이었던 사단칠정론에 칠정리발설(七情理發說)을 주장,

또 하나의 논단을 제시하였다.

응와의 학맥은 대산(大山) 이상정 → 입재 정종로 → 응와 이원조 → 한주 이진상

→ 면우 곽종석, 대계 이승희 → 심산 김창숙, 중재 김황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주는 응와의 장조카이자 제자로 응와의 성리설을 진일보시켜 심즉리(心卽理)설을 확립,

당시 학계를 경악하게 한 독창적인 학자였다.
응와는 응와문집 22권, 응와속집 20권, 응와잡록, 국조잡록, 포천지, 포천도지, 무이도지,

탐라록, 탐라지초보, 탐라관보록, 탐라계록 등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2011.02.04(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