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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성주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 鄭逑 神道碑)

 

한강 정구(1543~1620)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자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수학했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1573년(선조 6)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방 수령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동강 김우옹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나아갔으며

1585년 교정청(校正廳) 교정랑에 임명돼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 군수를 지내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1594년부터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 충주 목사, 공조 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했고,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렸다.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 鄭逑 神道碑)

 

이 비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조선 성리학사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신도비(神道碑)이다.

비석은 인조 11년(1633)에 수륜면 수성리 갓말마을 뒷산인 창평산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한강 정구의 묘소를 성주읍 금산리 인현산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현종 3년(1668)에 현재의 위치인 회연서원(유형문화재 제51호) 경내로 옮겨 세워졌다.

신도비는 비신(碑身), 이수(螭首), 귀부(龜趺)가 완전하게 잘 남아 있다.

이수에는 쌍룡문(雙龍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이 깊이 새겨져 있고,

귀부는 귀갑문(龜甲紋)이 양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90cm이며, 비신의 높이 230cm, 정면 폭은 106cm, 두께는 29.5cm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문목공한강정선생신도비명(文穆公寒岡鄭先生神道碑銘)”이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6cm, 세로 9cm이다.

비신의 4면에 걸쳐 가로 2cm, 세로 2.2cm 크기의 글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었고, 글씨는 김세렴(金世濂)이 썼다.

한강 정구 신도비는 조성연대가 오래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동방 5현의 한 사람인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학문의 연구대상을 온 우주의 공간으로 삼고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예학 등 여러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였던

한강 정구의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자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2호(2009.07.06 지정)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8

 

회연서원에 세워진 정구 선생 신도비  

 

 

 

이수에는 쌍룡문(雙龍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이 깊이 새겨져 있는 이수 부분

 

비몸 : 문목공한강정선생신도비명(文穆公寒岡鄭先生神道碑銘)

 

귀부는 귀갑문(龜甲紋)이 양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2011.02.04(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