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과 팔상전
(2024.07.15.월)
말티재자연휴양림에 하루 묵었다.
숙소가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숙소 구하기 힘들 때 가끔 이용한다.
특별한 외식거리가 없을 때 간단하게 집밥을 해 먹는 재미도 있고...
말티재자연휴양림 입구의 장재저수지.
방문 전 내린 비로 인해 물은 탁했지만
파아란 하늘에 구름이 어우러진 예쁜 날이었다.
말티재자연휴양림 초입에 말 탄 세조 동상이 있다.
옛날에 세조가 말티재를 넘었던 일을 표현한 동상이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말티재를 다시 넘는다.
말티재 전망대도 한 번 더 들러 말티재를 다시 보고 넘어간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를 향해 가니 여전히 상점들이 많다.
법주사 들른 후에 들어갈 음식점을 확인하고
그 음식점 앞에 차를 대고 법주사로 향한다.
주차 안내소.
일반 차량 진입금지 표시가 보이는 곳.
공영주차장은 조각공원 못 미처 왼쪽 안으로 조성되어 있네.
예전에 아이들 데리고 여러 번 다녀왔던 법주사인데,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꽤 오래 들르지 않았나 보다.
속리산 조각공원
1997년에 조성된 조각공원을 대충 둘러본다.
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어 있다.
법주사 와 본지도 오랜만이라 이곳도 오랜만에 본다.
달천을 건너서도 작품들을 대충 돌아본다.
속리산 산채비빔밥 솥
속리산 축제 때 쓰인다는 산채비빔밥 솥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이 그릇은 속리산 제일봉인 천왕봉 1,058m를 상징하는 것으로
매년 속리산 축제 때 속리산에 자생하고 있는 산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1,058명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졌네.
법주사 성보박물관
법주사 입장하는 곳 못 미처에 법주사 성보박물관이 건축되어 개관을 기다리고 있다.
올 9월 24일 개관한단다.
워낙 많은 국가유산들을 보유한 법주사라 자료도 아주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가게 되면 이곳도 들러봐야지......
법주사 입장 구역
사찰 입장료가 없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겠지.
속리산 오리숲길이 이어진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 (俗離山 法住寺 一圓)
명승으로 지정되었다(2009.12.09.).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과 관음봉을 잇는 명승이다.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불렸다.
법주사는 553년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세운 큰 절이다.
국보인 법주사 쌍사자 석등, 팔상전, 석련지 등과,
주변에 삼년산성(사적), 정이품송(천연기념물)등
아름다운 자연유산과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다.
(국가유산청 설명 자료)
법주사와 주변 경관에 대한 이야기, 국가유산과 세계유산 등재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본다.
속리산 자연관찰로
자연관찰로를 따라 걸어본다.
우거진 숲길에 야자매트가 깔려 발이 편하다.
법주사 일주문
'호서제일가람' '속리산대법주사'라 쓰인 법주사 일주문
수정암
달천 건너로 수정암.
달천 가까이 난 길이라 물소리까지 청아하게 들리니
오롯이 자연을 향유하는 느낌이 든다.
법주사로 바로 가는 방향과 세조길, 문장대, 천왕봉 가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법주사 부도전
법주사 못 미처 차도 옆의 부도전
보은 속리산사실기비와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報恩 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국가유산청 자료)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국가유산청 자료)
세조길
하마비와 세조길 입구
세조길 안내도와 문장대 모형이 세워져 있네.
남편이 이곳은 빼자고 한다.
혼자 잠시 걸어서 저수지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나온다.
'다음에는 다 걸어봐야지......'
보은 법주사 (報恩 法住寺)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9.12.21).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팔상전(국보)과
기발한 착상과 원숙한 조각솜씨로 조각한 쌍사자 석등(국보),
한국 제일의 석연지(국보), 사천왕석등(보물), 마애여래의상(보물),
대웅전(보물), 원통전(보물), 신법천문도(보물) 등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 문화유산이 있어
신앙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국가유산청 자료)
수정교를 건너 법주사 금강문을 통해 주 경내로 들어간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철당간, 석련지, 능인전, 금동미륵대불, 천왕문, 범종각, 철솥(철확) 등이 보인다.
금동미륵대불과 천왕문
금강문을 들어서면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금동미륵대불과 가운데로 천왕문.
보은 법주사 천왕문 (報恩 法住寺 天王門)
아주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2024.04.02.)
정유재란(丁酉再亂)이후 법주사 재건이 이루어지던 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2018년 천왕문 기둥과 사천왕상에 대한 연륜연대 분석결과, 기둥이 1619년과 1620년에 수렴하는 건축연대가 측정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현존 천왕문 중 가장 크고 넓으며, 좌·우 협칸과 퇴칸에는 소조사천왕 2구씩 4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소조상으로 보물로 지정(‘23. 10. 26.)되었다.
가구 구조는 1고주 7량가로 몸체 구조부와 공포부, 지붕가구부를 초방*, 덕량*, 승두* 등의 부재를 활용하여 정교하고 치밀하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일체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초방(初枋) : 창방 또는 인방의 뺄목, 끝머리 등을 초새김하여 장식한 것
* 덕량(德梁) : 도리와 종보 또는 동자주를 걸쳐대는 휨한 보
* 승두(蠅頭) : 중도리, 보가 장여 위에 걸칠 때 기울어지지 않게 직교하여 받치는 짧은 부재
포작은 외2출목, 내3출목 다포식 박공집임에도 정·배면 외 양 측면에도 포작이 짜여 있고 특히, 우주 상부 귀포는 45°방향 귀한대와 좌우대가 설치된 팔작집에서나 볼수 있는 전각포 형식을 갖춘 특징이 있으며, 특히, 내1출목에서 중첨차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법주사 원통보전, 팔상전, 대웅보전(상층) 등 정유재란 이후 재건되는 법주사의 주요전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가유산청)
보은 법주사 철솥 (報恩 法住寺 鐵鑊)
금강문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보은 법주사 철솥(철확)
보은 법주사 철솥 (報恩 法住寺 鐵鑊)
보물.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보은 법주사 철솥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시대 성덕왕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조선시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안내판 설명 추가)
법주사 당간지주, 석련지, 석조
왼쪽으로 법주사 당간지주와 석련지, 그리고 석조.
왼쪽 뒤로는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오른쪽 뒤로는 능인전과 세존사리탑.
보은 법주사 석련지 (報恩 法住寺 石蓮池)
국보.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는데,
현재는 균열되어 철제 꺾쇠로 연결해 놓았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국가유산청 자료)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 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조형물이다.
(안내판 설명 추가)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여진 5층 목조탑이다.
내부 한가운데에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기둥이 있는 구조이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국보.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유산청 자료)
* 법주사 팔상도의 내용 *
<천상에서 내려와 이 땅에 태어나다>
一相, 도솔래의(兜率來儀)
二相, 비람강생(毘藍降生)
<태자생활에서 출가로>
三相, 사문유관(四門遊觀)
四相, 유성출가(踰城出家)
<설산의 수행과 보리수 아래에서의 깨달음>
五相, 설산수도(雪山修道)
六相, 수하항마(樹下降魔) = 성도(成道)
<모든 이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七相, 녹원전법(鹿苑轉法)
<위대한 열반, 그리고 그 후>
八相, 쌍림열반(雙林涅槃)
법주사 팔상전 내부의 팔상도 모습들도 살펴본다.
가운데 기둥 벽 면 사방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다.
마침 내부에 관람객이 없어서 담아보았다.
금동미륵대불
대단한 미륵대불이다.
방문 당시 내부 전시관은 공사 중...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보물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법주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腹甲)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중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1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자료)
원통보전, 금동미륵대불,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물.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국가유산청)
법주사 진영각(眞影閣)
법주사 진영각에는 개산시조 의신선사를 비롯하여 진표율사, 태고선사, 벽암선사 등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報恩 法住寺 大雄寶殿)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報恩 法住寺 大雄寶殿)
보물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중 하나이다.
(국가유산청)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報恩 法住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報恩 法住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준다.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이다.
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손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동안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하여 임진왜란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緣起文)에 의하면, 조선 인조 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조선 영조 23년(1747)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초반의 불상연구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인조 4년(1626)에 현진(玄眞), 청헌(淸憲), 연묵(衍黙), 양묵(懹黙)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인(1747)년에 새로 금칠을 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은 목조 불상과 소조 불상이 주류를 이룬다. 대부분 네모반듯한 모양의 장중한 형태이며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다.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고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평가된다.
(안내판 설명 추가)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사천왕 석등과 팔상전.
팔상전 왼쪽으로 범종각, 약사전, 오른쪽으로 원통보전도 보인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報恩 法住寺 四天王 石燈)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報恩 法住寺 四天王 石燈)
보물.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국가유산청)
보리수 열매, 쌍사자 석등, 팔상전, 범종각.
오른쪽 끝으로 석련지.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국보.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국가유산청)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높이가 3.3m.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안내판 설명 추가)
궁현당 담장 옆으로 배롱나무꽃과 나무수국이 반기던 날에...
팔상전과 금동미륵대불
보은 법주사 능인전 (報恩 法住寺 能仁殿)과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報恩 法住寺 世尊舍利塔)
보은 법주사 능인전.
법당 뒤로 세존사리탑이 보인다.
보은 법주사 능인전 (報恩 法住寺 能仁殿)
능인전(能仁殿)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가 옮겨져 있다.
(국가유산청)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報恩 法住寺 世尊舍利塔)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報恩 法住寺 世尊舍利塔)
고려 공민왕이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 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세워놓은 사리탑이다.
8각을 기본형태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만든 것으로 전한다.
(국가유산청)
팔각원당형의 사리탑으로 높이는 3.5m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탑은 고려말기~조선 초기의 승탑에서 유행한 형식으로 탑신의 몸체가 공 모양으로 바뀌고 지붕은 처마 끝이 둔중해지며 지붕 위의 경사도 날로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사리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안내판 설명 추가)
속리산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磨崖佛 : 암벽에 새긴 불상)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 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안내판 설명)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이 새겨진 곳.
마애여래의좌상이 새겨진 곳 왼쪽으로 수정암이 이어진다.
수정암 옆 부도전이 있다.
이곳으로 통하여 초입의 상업 지역으로 나갈 수 있다.
수정암쪽에서 바라본 법주사 방향.
오랜만에 들렀던 법주사이다.
국보와 보물, 충북유형문화재 등 다양한 유산을 지닌 법주사!
오리숲길, 자연관찰로를 걸어 들어가면서부터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찰이다.
금강문을 들어서서 천왕문, 팔상전, 대웅보전을 거쳐 세존사리탑, 마애여래의좌상까지 두루 둘러보았는데,
언제 들러도 편안한 모습과 변함 없는 모습이 좋았다.
팔상전 내부는 늘 사람들이 있어 못 찍었었는데,
이번에는 팔상전의 팔상도까지 찍을 수 있어서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남편의 말에 세조길 입구만 걸었다.
다음에는 세조길 전 구간도 꼭 걸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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