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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인천 강화] 교동도 남산포구(삼도수군통어영지, 사신관터)~교동읍성

교동읍성 (2021.09.03.) (2023.06.11.일)

<1박 2일(2023.06.11.~12.) 강화 일정>

* 1일: 교동도(신분증 필수) - 화개정원(연산군 유배지)과 화개산전망대, 화개산뜰(점심), 교동 순례자의교회, 대룡시장, 교동망향대,

난정저수지 보리밭과 전망대, 남산포구(삼도수군통어영지), 교동읍성, 화개사, 교동향교, 월선포, 박두성생가, 석모도 자연휴양림(숙소)

* 2일: 석모도 - 석모도 자연휴양림, 석모도수목원, 뜰안에정원(점심), 스카이랜드비치, 민머루해수욕장, 나룻부리항(석모도 선착장),

강화도 - 외포항, 분오리돈대, 동막해수욕장, 서해촌(저녁)

 


 

난정저수지를 거쳐 남산포구로 가 본다.

지금은 북한과 인접한 섬, 안보 요충지가 된 교동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곳이란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전라, 경상, 충청의 삼도 수군을 관장했다면

삼도수군통어영은 경기, 황해, 충청의 삼도 수군을 관장했다.

참으로 대단하고 중요한 부대가 교동에 주둔했던 것...

 

 

 

남산포구(삼도수군통어영지)

1629년 한성 방어를 위하여 남양 화랑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기고

1633년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여

경기도는 물론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관장하던 부대의 터이다.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적하여 해안을 방어하였다.

근세에 선착장을 개축하여 이 일대의 지형이 상당히 변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인근에 정박 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안내문에서...)

1629년(조선 인조 7년) 경기수영을 남양 화랑진에서 강화 교동으로  옮김.

1633년(인조 11년) 교동에 삼도(충청, 경기, 황해)수군통어영 설치.

 

 

옛 삼도수군통어영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아쉽네.

바다 건너로 석모도, 미법도, 서검도가 바라보인다.

 

 

지금은 북한과의 인접 지역이라

북한군의 목함지뢰, 대인지뢰를 주의하라는 안내,

귀순자가 입항한 곳이라는 설명을 보니

머리카락이 곤두섬...... 

 

 

사신관터와 사신당

* 사신관터: 고려 시대에 중국(송나라) 사신이 뱃길로 올 때 맞이하던 사신관이 있던 곳.

* 사신당: 우리나라와  중국 사신이 왕래할 때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당집에서 유래.

 

 

바닷가 자연석에 정으로 쪼아 만든 층대가 있다는데,

사신이 오갈 때 배를 타기 위해 만든 층대라고 한다.

위치 표시가 없으니 정확한 건 못 찾겠다.

 

 

가파른 돌길을 따라 사신당지로 올라가본다.

기도 중인 무속인 한 분이 보여서 피해서 돌아본다.

 

 

사신당지의 사신당.

19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우리나라와  중국 사신이 왕래할 때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당집이 있던 터.

방문 당시에 어느 무속인이 기도를 하고 있어 정면으로 찍지는 못 하였다.

무속인들이 가끔 찾아오는 모양이다.

 

 

사신당지에서 내려다본 남산포구.

바다 건너로 석모도가 바라보인다.

사신관이 있던 곳,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곳~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곳이

지금은 당시를 알 수 없는 모습이 되어 있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수없이 흘러 보냈기에......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기념물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교동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으며, 군데군데 문을 내어 바깥과 통하도록 만들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자료)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축성.

1633년에는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여 해안을 방어하였다.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근래에 복원한 모습이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남문.

 

 

남문(누각은 유량루).

주변이 복원되어 이제 읍성 느낌이 좀 나네.

너무 새것 티가 나는 것은 아쉬움...

예전에는 주차장 자리가 밭이었다.

 

 

교동읍성 남문인 유량루.

1921년에 폭풍으로 남문 문루 부분이 무너졌었는데,

2017년 복원한 것이란다.

2010년인가에 방문했을 때 홍예 부분만 있었던 걸 본 기억이 난다.

안쪽으로 보이는 집도 대문을 달았네.

 

 

2010년(2010.05.02. 일) 방문 당시의 교동읍성 남문 모습

성문 앞으로는 밭이 있었다.

홍예  분과 주변의 석재가 2010년 당시의 모습이 조금 자연스럽긴 하네.

 

 

비가 있었을 것 같은데,

받침돌만 쓸쓸하게 남아있네.

 

 

오래전에 배를 타고 들어와 방문했을 때는 이 홍예 부분만 남아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가운데 위가 뚫려 하늘이 보였었지.

성 안으로 보이는 집도 대문을 다시 달고~ 모습이 바뀌었네.

 

 

남문 홍예 아래 부분에 새겨진 글씨~

 

 

남문 안쪽으로 들어와 본다.

 

 

남문 안쪽 홍예 부분 양쪽 아래에 쓰여진 글자 부분

 

 

보이는대로 읽으면 '삼도통~문'인데,

'삼도수군통어영문'을 뜻하는게 아닐까 싶다.

'남루'~ 남문 누각을 말하는 것 같고...

 

 

근래에 와서 교동읍성 남문 주변이 많이 복원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 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궁금해지네.

(2021.09.03.) (2023.06.11.일)

 

 

 

* 2010년의 교동도 이모저모

https://leeke2000.tistory.com/16505029

 

2010.05.02(일) 강화 교동도

강화 교동도 < 교동도 > 38선 근처 황해상에 있는 섬으로 강화도보다 서쪽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2012년 완공되는 교동대교를 통해 강화도와 연결되면 육지와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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