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5. 일. 여행 3일차)
호텔 조식 후 빌뉴스 구시가를 돌아보게 된다.
올드타운은 빌뉴스의 역사지구.
13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이 1500여 채 이상 남아있는데,
교회가 이 지역에만 20개 이상이나 된단다.
새벽의 문(샤프 게이트라고도 함)을 들어서며
빌뉴스 구시가 관광을 시작한다.
새벽의 문(Aušros vartai, Gate of Dawn)과 새벽의 문 성당(Chapel of the Gate of Dawn)
새벽의 문은
빌뉴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성문으로
구시가를 드나드는 성문.
샤프 게이트로도 불린다.
16세기(1503-1522년)에 9개의 성문을 낸 방어 요새를 지었는데,
각 성문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그림과 상징물들을 배치했단다.
이곳을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로 돌을 받았고,
그 돌은 성곽을 쌓는데 사용했단다.
구시가지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500년의 역사.
새벽의 문 성당은 새벽의 문 안쪽 위에 있는 작은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1671년에 모셔진 성모 마리아 성화가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불린다.
검은 얼굴의 성모 마리아 성화가 모셔져 있다.
리투아니아의 성지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성모 성화가 모셔진 이후로 추정되는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의 은유인 새벽 또는 여명의 의미를 담은
새벽의 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도 다녀가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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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레사 교회
성 삼위일체 교회와 바실리안 문
성 카시미르(카지미에로, 카지미에라스) 성당
빌뉴스의 시나고그와 게토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리투아니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았다고 한다.
빌뉴스에 21만 명이나 되는 많은 유대인이 살았다던가
(26만여 명이라고도 하고 정확하진 않다)...
1941년 6월 24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히틀러의 독일군은 빌나를 점령했다.
빌뉴스도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게토가 만들어졌고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히고 통제를 받게 되었다.
빌나(빌뉴스)는 18세기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의 산실이었기에
‘리투아니아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나치의 대학살로 유대인 대부분(19만여 명 정도)이 사망했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 유대인의 수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수많은 유대인이 핍박을 받은 건 사실이다.
2차 대전 전까지 전체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유대인~
리투아니아계 유대인들은 리트박으로 불렸다고 하며
독일 방언에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가 융합된 이디시어를 사용했단다.
현재는 빌뉴스 대학교에서 이디시어 연구와 강의가 진행되고 있단다.
다른 유대교 회당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전쟁 후에는 부분적으로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단다.
하나 남은 이 유대교 회당은 약탈당했지만 나치가 창고로 사용했던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고,
소련 점령 시기에는 자물쇠 제조공의 작업장으로 사용되었단다.
소비에트로부터 독립한 후 1994년 개조,
2010년에 복원하여 다시 유대교 회당으로 문을 열었단다.
예전 유대인 강제 집단 거주지였던 게토 지역을 두루 돌아보고 싶었으나
일행과 함께 이동하니 패스해야겠네...
빌뉴스 시청과 시청 광장
1432년 처음 건축되었다고 하며, 고딕 양식.
이후 여러 차례 재건.
현재 빌뉴스 시청 건물은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구체비치우스의 작품이다.
1799년 경 완공.
외국 국빈이 방문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시청 광장은 15세기 초까지 작은 상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확장과 무역의 발달로 상점의 수가 증가했단다.
현재 주요 박람회, 축하 행사, 이벤트 장소 등으로 이용된다.
시청 광장 작은 분수대 앞 빌뉴스 나침반 기념비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된다.
이어서 필리에스 거리를 걸어 빌뉴스 대성당쪽으로 이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