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충북 옥천] 이원면 이모저모 - 송시열 유허비 외

[충북 옥천] 이원면 이모저모 - 이원 묘목산업특구, 송시열 유허비 외

 

 

옥천성당, 용암사를 돌아 이원면으로 갔다.

송시열이 태어난 곳이 이원면...

26세까지 자란 곳이니 그야말로 송시열의 고향이다.

이원면은 묘목으로도 유명한 고장...

송시열 유허비를 찾아가는 길에 여기저기 설렁설렁 돌아보기로 한다.

 

 

묘목산업특구

이원면에 들어서자 묘목산업특구라는 커다란 선전탑이 눈에 띈다.

 

 

 

이원 주위는 온통 농원 천지다.

 

 

 

지나가며 본 거리 풍경들~

오래된 양조장의 모습이 정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원역 앞의 3.1운동기념비...

이런 시골에도 3.1운동을 기념하는 비가 서 있어

곳곳에서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게 된다.

 

 

 

이원역

지금은 열차가 하루 몇 대 서지 않는 작은 역...

 

 

 

역 앞 풍경

벽에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원면사무소

전국 제일 묘목의 고장이라길래 찍어 보고...

 

 

 

교회 건물도 지나가며 담아보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예전에는 그 지방의 이름난 곳들을 주로 둘러보았으나

요즈음은 그냥 유람삼아 소소하게 느껴지는 곳들도 돌아보게 된다.

네비로 찾기도 쉽지는 않은 곳~ 그곳들을 잠시 찾아본다.

옥천 이원면 소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두암리 삼층석탑과 창주서원 묘정비가 있다.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 (沃川 斗岩里 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582-3번지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에 위치한 삼층석탑으로

지금은 민가 사이 아주 좁은 공간에 서 있다.

 

 

 

 

 

 

주위에서 고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당시의 옛 절터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

* 위치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582-3번지

 

 

 

두암마을의 삼층석탑을 본 후 이원교를 건너 현리로 향한다.

현리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창주서원 묘정비를 만난다. 

 

 

 

 

옥천 창주서원 묘정비 (沃川 滄州書院 廟庭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105호

 

옥천군 이원면 현(縣) 마을 옛 창주서원 (創洲書院) 자리에 서 있는 이 묘정비(廟庭碑)는

1682년 숙종(肅宗) 8년 창주서원 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세운 비로서

우암(右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글을 짓고

곡운(谷雲) 김수증 (金壽增)이 글을 썼다.

이 비는 장방형(長方形)의 기초석(基礎石) 위에 비신 (碑身)을 세웠으며

비신 위에는 기와지붕 모양의 비 갓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올려 놓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창주서원 묘정비

숙종 때 '창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세운 비라고 한다. 

좁은 동네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다.

* 위치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3길 24 (이원리)

 

 

 

옥천 송시열 유허비 (沃川 宋時烈 遺墟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숭정후삼술이월일’이라 새겨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조선 정조 년간(재위 1776∼1800) 즈음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옥천 송시열 유허비와 비각

이 유허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나고 자란 곳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다.

 

 

 

뒷면에는 ‘숭정후삼술이월일’이라 새겨져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조선 정조 년간(재위 1776∼1800) 즈음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송시열

 

우암 송시열은 충북 옥천군 구룡촌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26세(1632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

뒤에 대전 회덕으로 옮겨 살았단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딤.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됨. 

1636년에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함.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

효종 급서 후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 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만 1년 상복)을 주장하여

3년복을 주장한 남인윤휴와 대립.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대공설(9개월 상복)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제2차 예송)

1675년,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

거제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

1680년에 경신환국(서인에 의한 남인 축출 사건)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

서인노론의 영수.1689년 숙의장씨(장희빈)가 낳은 아들(경종)의 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됨.

그 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

이후 영의정 추서, 문정 시호를 받음.

 

옥천 송시열 유허비와 곽자방 충신문

* 위치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134-2번지

 

 

 

임진왜란 때 금산성전투에서 조헌과 함께 전사한 의병 곽자방의 충신문

옥천 송시열 유허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의병 봉사공 곽자방의 충신

 

 

송시열 유허비와 곽자방 충신문을 본 후 경현당으로 향하였다.

이곳도 네비에 표시되지 않아서 동네 어른께 여쭈어서 찾아간다.

'얼마쯤 가서 왼쪽으로, 또 얼마쯤 가서 다리를 건너고, 또 얼마쯤 가서...'

설명을 들었지만 길은 좁은 농로들이 여러 갈래 있고,

다리라고 생길 정도는 아닌 곳들을 지나자니

동네 어른의 말씀이 다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인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경현당...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에 있어서 제대로 찾지 못하고

금강변 둑길에 올라가서 바라보고서 겨우 찾아냈다.

 

 

 

 

옥천 경현당 (沃川 景賢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조선시대 지방의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 건물이다.

조선 숙종 23년(1677)에 교육을 실시하는 경현당과

제사를 지내는 용문영당을 함께 세웠으나

용문영당은 허물어져 없어졌다.

경현당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이 있는 매우 소박한 구성의 집이다.

온돌방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다.

그 외 당내에는『시안』,『용문서당계좌목』 2개의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

(문화재청)

 

 

조선시대 지방의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 건물인 경현당.

산허리에 위치한 건물을 당겨보았다.

 * 위치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3길 88-17 (용방리)

 

 

 

잠시 둑방길을 걸어본다.

 

 

 

때마침 KTX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달리는 열차처럼 마음도 어디론가 달려가게 된다...

 

 

2015.06.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