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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충북 옥천] 옥주사마소, 옥천 교동리 비석군, 옥천향교

[충북 옥천] 옥주사마소, 옥천 교동리 비석군, 옥천향교

 

승용차를 이용하여 옥천 읍내를 관광할 때 편리한 여행 코스다.

옥천 I.C - 향수공원 - 죽향초등학교 구교사와 죽향리사지 삼층석탑 - (춘추민속관)

-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 옥주사마소 - 옥천 교동리 비석군 - 옥천향교 - 육영수 여사 생가

 

정지용 생가를 둘러본 후

육영수 생가 가는 길에

옥주사마소와 교동리 비석군, 향교를 차례로 방문했다.

 

 

요즘 한창인 능소화를 보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높았고,

거기에 능소화까지 보태니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옥천 옥주사마소 (沃川 沃州司馬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7호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 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 내부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계규약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있다.

(문화재청 자료)

 

 

정지용 생가에서 육영수 생가를 향해 가다가 안골목으로 들어가서 만난 옥주사마소

 

 

 

사마소는 조선시대에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라고 한다.

 

 

 

옥주사마소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의창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의창 : 평시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그것으로 빈민을 구제하던 기관 또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

 

 

 

 

 

옥주사마소 앞마당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거기에 벌이...

 

 

 

건물 뒤 텃밭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조금씩 심어져 있었다.

 

 

 

조그만 수박이 보여서...

실제로는 주먹만한데, 가까이 찍어서 크게 보인다.

 

 

 

능소화~ 그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찻집도 지나가고...

 

 

꽃집도 지나가고...

살림집이면서 꽃집이기도 한 '꽃이 피는 집'이다.

 

 

바깥에서 연신 꽃을 보살피는 주인을 만났다.

이 집에서 직접 꽃을 기르고 팔고 있단다.

집도 깔끔하게 지어서 살기에도 좋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꽃과 함께 하니 참 행복할 것 같았다.

 

 

 

 

옥천 교동리 비석군

 

 

 

 

조선시대에 옥천 지역을 다스렸던 관찰사 등의 선정비를 모아 놓은 옥천 교동리 비석군

 

 

 

 

비석군 맞은편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옆에는 마을자랑비를 세워 놓았다.

 

 

 

이 느티나무는 37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이다.

 

 

 

바로 옆에 정자가 있어서 그곳에서 찍은 모습이다.

잠시 정자에 앉아서 쉬면서 마을을 둘러보니

가로우면서도 깔끔한 주위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옥천향교 (沃川鄕校)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청)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는 옥천향교 입구

 

정지용 생가에서 육영수 생가쪽으로 직진 이동하여

교동리 비석군, 정자와 느티나무를 만나면 바로 이웃에 향교가 있다.

 

 

 

출입문이 따로 없고 명륜당 아래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옥천향교.

옥천향교의 명륜당은 외삼문과 강당의 기능을 겸한 건물이다.

문이 닫혀 있어서 바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향교로 통하는 옆문으로 이동하였다.

 

 

 

담 너머로 대성전을 바라보았다.

 

 

 

명륜당 뒷마당에 서재인 홍도당이 남아 있고(사진 뒤 왼쪽),

언덕 위로 대성전이 배치된 모습이다.

홍도당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주인 잃은 향교의 적적함이 느껴지고

담 주위에 몇 그루 피어난 접시꽃도 외로워 보인다.

 

 

 

향교 옆 관리 건물

담 너머로 두리번거리다가 여기도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시는 서예가 한 분이 나오셔서 향교문을 열어주셨다.

 

 

 

옆문으로 들어와서 본 관리사(고직사)쪽 모습...

원래 동재 자리이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고직사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넓은 잔디밭에 들어와서 바라본 대성전의 모습

(내삼문 안쪽으로 서무, 대성전, 동무)

 

이곳에서는 특이한 내삼문 구조를 보게 된다.

보통은 합쳐진 내삼문 구조를 보이는데 반하여

이곳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별개의 문으로 내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세 문을 다 열어놓는다.

가운데 정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양쪽의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란다.

사람들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문으로 들어가고 왼쪽문으로 나오게 된다.

 

 

 

아래에 위치한 명륜당을 바라보니 먼저 아궁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인 아궁이는 바닥에서 불을 지피게 되지만 이곳은 주변이 허공이다.

이런 구조는 처음 보았다.

열이 가능한 한 구들 공간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굴뚝을 작은 구멍을 내어 처리한 점도 특이했다.

이런 특이한 구조로 하여 건축물을 연구하는 분들도 많이 찾아오신다고 한다.

 

 

 

옆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굴뚝이라니~~~ 참 특이한 구조였다.

 

 

 

당당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옥천향교 명륜당의 모습

 

옥천 옥주사마소, 교동리 비석군, 향교까지 돌아보았다.

그 무엇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옛 사람들은 가고 없어도 그 자취가 남아서

훗날에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는 문화재들...

오래도록 보존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15.06.27(토)

 

[옥천향교]

전화번호 : 043-730-3114

위치 :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