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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충북 옥천] 조헌 묘소와 신도비

[충북 옥천] 조헌 묘소와 신도비

 

2016.06.27(토)

 

옥천 여행 첫날, 구읍 지역의 문화재들을 돌아본 후

장계관광지에 들렀다가 다음으로 조헌 묘소를 방문하였다.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다.

경기 김포 출생이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청주성 수복에 힘썼다.

그 후 의병이 강제해산 당하자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

금산 칠백의총이 그 700의사를 기리는 무덤이다.

 

조헌의 유해는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

이후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단다.

 

 

조헌 묘소 주변(표충사와 영모재).

두 건물 사이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소나무숲 사이에 묘소가 있다.

 

 

 

옥천 조헌 신도비 (沃川 趙憲 神道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조헌은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567년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 밤티로 들어가 제자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하여,

과 700여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고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칠백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비에는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다.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조헌의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은 신도비 일부(후면)

 

 

 

 

 

 

 

 

조헌 신도비와 비각

묘소 앞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 앞에서 마을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 산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앞으로 펼쳐지는 넓은 잔디밭이 싱그러워 보인다. 

 

 

 

표충사(좌)와 영모재(우)

 

 

 

 

 

영모재.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 준비를 위한 재실로

관리인이 살고 있는 집이다.

 

 

 

조헌과 그의 아들 조완기를 기리는 사당인 표충사

 

 

 

 

 

 

 

표충사와 영모재를 바라본 후 묘소로 오른다.

돌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진다.

울퉁불퉁한 돌을 그대로 써서 자연미가 있어 보이긴 하나

넘어지면 많이 다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묘소 가는 길...

 

 

 

표충사(홍살문, 삼문, 사당)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峰) 조헌(1544∼1592) 선생의 묘소이다.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국가 정책에 있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일본과의 친교정책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으나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조헌 묘소

 

 

 

묘 앞에 비 2기가 서 있는 모습이다.

하나는 원래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헌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

 

 

 

 

 

 

주변의 소나무숲이 선생의 사후를 포근히 감싸주는 듯 보였다.

 

 

 

여름날의 개망초가 아련한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삼문 앞으로 홍살문이 있는데, 소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조헌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

조헌과 그의 아들 조완기를 함께 모신 사당이다.

아들 조완기도 금산전투에서 함께 순절했으니

대를 이은 충성심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진다.

 

 

 

하늘빛이 참 고왔던 날에 다녀온 조헌 묘소...

사람은 가고 없어그의 애국심은 영원히 살아 있고,

가끔은 찾는 이들이 있어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2015.06.27(토)

 

[중봉조헌신도비]

전화번호 : 043-730-3083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9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