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인천]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섬 실미도 1 : 실미도에 들어가다

픈 역사를 간직한 섬 실미도

 

실미도...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도 내색하지 않는 슬픈 전설의 섬, 실미도...

이번 방문이 횟수로는 세 번째였다. 

실미도는 이웃 섬 무의도와 개펄로 연결되어 있어 물이 빠지는 시간엔 건너다닐 수 있다.

지난 두 번의 방문은 물이 빠져 있는 시간이 짧아서 잠시 건너갔다 오기만 했지만,

이번엔 다행히도 3시간이나 여유가 있어서 대충 둘러볼 수 있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소재

 

 

우리나라 최장 다리인 인천대교

 

 

잠진도에서 배를 타고...

 

 

잠시 몇 분 지나...

 

 

무의도에 도착하다.

 

 

실미유원지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해변에 세워진 영화 '실미도' 이야기를 접하다.

영화를 보았을 때의 짠한 아픔이 되살아나 안타까웠다.

 

 

실미도 가는 길 이정표

 

 

 

 

 

 

무의도의 실미유원지, 실미도 관광 안내와 실미도 이야기...

 

 

실미유원지(무의도쪽)에서 본 실미도

 

 

 

  

 

 

마침 물때가 알맞아 쉽게 실미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아픈 전설의 섬 실미도...

 

 

모래 해변을 잠시 걷는다. 

 

 

작은 오솔길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굴양식장 풍경이 슬며시 보이기도 하고

솔 숲 사이 풍경이 정겹다 싶기도 하다.

 

 

그렇게 산을 넘으면 '실미도' 세트장이 있었던 해변이 나온다.

영화 말미에 폭파 장면이 있었던 이유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영화 '실미도'...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 31인의 살인병기 "실미도부대" 탄생.

'주석궁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의 임무다!'

북으로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사람들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에게 나타난

예의 그 묘령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 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다.

실미도와 함께 제주도, 뉴질랜드, 지중해 말타(수중 장면) 등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인천시청)

 

 

 

 

 

 

 

 

'실미도' 세트장이 있었던 해변의 바위들  

 

 

 

실미도 사건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8.15 평화통일구상선언> 계획을 두고 있는 정부한테서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터뜨려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 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본래 31명 중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현대 R192)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두 번째 버스(신진 FB100L, 태화상운 소속 수원-인천간 시외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실미도》(1999년)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 감독의 동명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다음 한국어 위키백과)

 

2012.01.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