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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

 

 

울산왜성이 있는 학성공원은 규모는 작으나 높은 지대여서 숨을 헐떡이며 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요즘 공원이라고 생긴 곳엘 가면 노인분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가파른 오르막 산에 자리잡은 터라 노인들이 오르내리기엔 좀 불편하지 않을까~~~. 박상진 추모비와 봄편지 노래비가 있는 제1광장에서는 윷놀이에 열중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 모습이 적게 보였는데, 역시 오르막이라 노인분들에겐 힘드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 자리는 윗쪽 3층 광장이었는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높은 곳까지 오르내리는 관광객도 없을 뿐더러 안전한 보존을 위해 옮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편에는 울산왜성 표지석이 서 있었다.

 

이 부도는 원래 1962년 중구 태화동 '반탕골' 산비탈에서 발견된 것을 수습 직후 일시적으로 부산 경상남도 도청으로 옮겼다가, 1983년 다시 학성공원 현 위치로 옮겨왔는데,  이곳은 개방된 곳이어서 도난 및 훼손 위험이 높고, 타 지역민의 접근성 곤란과 문화재 홍보 및 탐방에 비효율적이며, 탑의 본래 위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 논의가 계속되어 온 모양이었다.

 

학성공원(울산왜성)의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가 있던 자리

표지석을 만들어 부도가 울산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은

보물 제441호, 현재 울산박물관 소재.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사리탑이 유일하다.

일반적인 사리탑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파놓아 사리를 모셔 두도록 하였다. 감실 입구 아래로는 12지신상을 돌려가며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12지신은 띠를 나타내는 12동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능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조각되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처럼 사리탑에 새겨지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사리탑을 하나의 묘로 보아 이들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모양의 사리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며, 수법이나 조각들의 기법들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석종형(石鐘形) 부도 중에 가장 오래된 유물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한 것으로도 유일한 고승(高僧)의 사리탑(舍利塔)이다.   

 

이 부도는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석종형의 탑신(塔身)을 안치한 형태이며, 그 탑신의 앞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하고 그 하단에는 십이지상을 양각(陽刻)했는데 사람의 몸에 짐승머리를 한 형상이다. 십이지상은 능묘(陵墓)와 석탑에는 보이나 부도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남쪽은 오상(午像:말)이고 북쪽은 자상(子像:쥐)이다.    

 

태화사는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7, 재위) 때의 창건으로 전하나, 이 부도는 그 뒤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時代)에 이르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10cm이다. (문화재청 자료)

 

 

울산박물관 개관으로 옮겨간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문화재청 사진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