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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울산 학성공원(蔚山 鶴城公園)과 울산왜성(蔚山倭城)

울산 학성공원(蔚山 鶴城公園)과 울산왜성(蔚山倭城)

 

학성공원

 

울산 중구  학성동 100 일원.  

한말 창간된 경남일보 사장 김홍조 옹이 1913년 땅을 울산면에 기증하면서 생긴 공원이다.

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학성이라고 불렸다고 하며

신라 때 울산을 지칭하던 계변성을 이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낸 돌로 이곳에 울산왜성을 쌓았는데,

그 때만 해도 학성 남쪽은 바다와 닿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울산왜성터를 비롯, 봄편지 노래비, 충혼비 등이 있다.

작년까지 이곳에 있던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보물 제441호)는 울산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박상진 의사 추모비

 

 

 

봄편지 노래비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서덕출 시)

 

이곳 땅을 사들이고 공원으로 꾸민 추전 김홍조 공덕비 

 

 

 

이곳은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가 있던 자리다.

이 사리탑은 울산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사실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를 보려고 이곳에 들렀었는데......


 

 

 

울산왜성(蔚山倭城)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울산 중구 학성동 100 일원

 

울산광역시 학성동에 있는 이 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불리던 성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이라 불렀다.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우리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이 성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

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

 

 

정유재란 때 이 성에서 큰 교훈을 얻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오래도록 버틸 수 있도록 설계한 아주 견고한 성인 구마모토성을 쌓게 된다.

구마모토 성 안에는 우물을 120개나 파고, 다다미방에는 식량으로 쓸 수 있는 고구마줄기를 깔았다고 한다.

 

 

울산 옛지도

증성이라고 씌어진 곳이 울산왜성

 

 

울산왜성 전투도

 

 

울산왜성 설명

 

 

 

 

 

 

남은 흔적들

 

2011.05.0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