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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파주] 파주 나들이 3 - 황희선생유적지(방촌기념관, 황희 영당, 반구정 등)

반구정 (2023.03.11.토)

 


 

화석정에서 이동한 곳은 황희선생유적지.

파주 여행 시 몇 번 들렀던 곳.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황희선생의 자취를 만나러~~~

 

 

황희선생유적지(방촌기념관, 황희 영당, 반구정 등)

이곳은 조선 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 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의 자는 구부,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판강릉대도호부사 군서의 아들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 나오게 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세종 연간에는 18년간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세종 성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종 2년(1452)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예장하고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이다.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조 1년(1455)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황희선생 영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위치하고 있다.

본래의 영당 건물은 6.25전쟁 때 전부 불탔으나

1962년에 후손들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양식의 맞배집으로 복원하였고

영당 내부 중앙에 별도의 감실을 두고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반구정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기암 절벽 위에 위치하는데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는 뜻에서 이름 지었다.

정자 내부에는 미수 허목의 <반구정기>와 여러 개의 중수기 편액이 있다.

이외에도 월헌공 선생 부조묘, 앙지대, 경모재, 방촌황희선생동상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황희 선생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한 방촌기념관이 있다.

 

(안내 설명에서...)

 

황희선생유적지 안내도

 

황희 선생 유적지 입구

매표(성인 기준 1,000원) 후 입장하게 된다.

 

 

방촌기념관

황희 선생의 업적과 유품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

황희의 일대기, 인품, 관련 유적, 일화, 유묵 등을 알 수 있다. 

방촌기념관. 기념관 뒤 담 너머로 유명한 장어집인 반구정나루터가 있는데, 이날 갈 곳은 아니다. 매운탕 먹으러 갔기에...
황희 연보 -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개성 출생, 조선 문종 2년(1452년) 사망.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두루 여러 관직을 거치며 신임을 얻는다. 87세까지 관직의 자리에 있게 된다.

두문동과 두문불출 이야기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두문동 선비들에게 새 왕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나

새 왕조 참여를 거부한 고려의 신하들은 두문동(杜門洞) 산골에서 은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여기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젊은 선비 황희의 출중함을 안 두문동 선비들은

왕조는 바뀌었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 나가서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자신들의 일을 세상에 알려줄 인물로 황희를 지목한다.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황희는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고(30세)

세종조까지 오랜 시간을 관직에 있었으며 청백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표적인 예로 세종대의 황희를 든다. 기념관에는 파주의 청백리들도 안내하고 있다.
소공대비(召公臺碑) 탁본 - 소공대비는 강원도 삼척에 있다.

소공대비

삼척 노곡리 마을 옛 국도변에 서 있는 비로, ‘소공대’위에 놓여 있다.
조선 세종 5년(1423) 이곳 일대에는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구하고자 황희 선생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였고,

이곳으로 부임해 온 황희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도와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시 황희가 가끔 쉬곤 하던 와현(瓦峴)이라는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1516) 그의 증손인 황맹헌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뒤 보수를 하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져 부러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선조 때 삼척부사로 부임해온 그의 6대손 황정식이

옛 비를 치우고 그 터에 다시 세워놓은 것이다.
비는 낮고 널찍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윗면 양쪽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소공대비’라는 비의 명칭이 가로로 적혀 있다.

선조 11년(1578)에 세운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려원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설명)

 

소공대비 설명
소공대비 설명
황희 관련 일화
황희 관련 일화
황희 관련 일화
황희 관련 일화
황희 관련 일화
황희 관련 내용을 병풍으로 소개해 놓았다.
맨아래는 황희의 유묵. 황희동상 아래에도 새겨져 있는 글씨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 반구정 설명
세종실록과 태종실록의 내용
세종실록과 태종실록의 내용 설명

 

 

 

방촌선생 영당(황희선생 영당)

황희선생 영당과 반구정 가는 곳. 청정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청정문 옆으로 황희선생 영당 안내판

 

 

재직사

- 고직사

황희 유적지 관리 등의 일을 한다.

청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왼쪽에 재직사
재직사
왼쪽부터 월헌사, 방촌선생영당, 경모재

 

 

월헌사

월헌사는 소양공 월헌 선생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이다.

소양공 월헌 선생은 황희의 현손(고손자).

월헌사
월헌사 설명
월헌사. 문이 닫혀 있어 담너머로 바라봄

 

 

방촌선생영당

이곳은 황희 선생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원래의 영당은 6.25전쟁 때 소실.

1962년에 후손들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복원.

영당 내부 중앙에 별도의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방촌선생영당
방촌선생영당
방촌 황희 선생 영정
황익성공(황희)영당중영기
방촌선생영당
방촌선생영당

 

 

 

경모재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

 

 

 

황희 선생 동상

황희 선생 동상
동상 아래의 단에 황희 선생이 1423년(세종 5년) 감사 재직 시에 남긴 유묵이 쓰여 있다.
이것은 해석한 것

 

 

반구정 (伴鷗亭)

‘반구정’은 조선 시대의 황희(黃喜, 1363년-1452년)가

관직에서 물러나 남은 인생을 보내던 곳으로,

임진강 주변 언덕에 세운 정자(亭子)를 말한다.

주변에 낙하진(洛河津)과 가깝게 있어 ‘낙하정(落河亭)’이라 하였으나,

임진강 주변을 가득 채운 갈매기들과 함께 놀겠다는 의미로 ‘반구정’으로 불렀다고 한다.

반구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허목(許穆)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 에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潮水; 밀물과 썰물) 때마다 백구(白鷗; 흰 갈매기)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라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반구정은 한국 전쟁 때 모두 불타 없어졌었다.

이후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98년에 ‘유적지 정화사업’의 하나로 반구정을 새로 지었다.

현재는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의 ‘황희 선생 유적지’(기념관, 영당, 앙지대 등) 안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규모는 전면 2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모임지붕으로

지붕 꼭대기에 절병통(節甁桶; 모임지붕 꼭대기에 올려놓은 호로병 같은 장식 기와)이 놓여 있다.

 

(문화재청 설명 자료)

 

 

앙지대(왼쪽)와 반구정(오른쪽)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남은 인생을 보내던 곳, 반구정

반구정은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곳.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고 '반구정(伴鷗亭)'이라고 이름지었단다.

허목(許穆)의 반구정기(伴鷗亭記)에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이다."

라고 묘사해 놓았단다.

 

 

내부에는 미수 허목의 반구정기와 윤희구의 반구정중건기, 그외 반구정중수기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심산 김창숙의 반구정중건에 붙이는 글과 중건기(1957년 정유년), 전 파주군수 남상집과 전 파주시장 송달용의 반구정중수기
임진강가의 반구정
앙지대쪽에서 바라본 반구정

 

 

앙지대(仰止臺)

앙지대의 '앙지'는 황희 선생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 

유림들이 황희의 덕을 추모하여 영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할 때

함께 지었다고 한다.

안내 설명에 의하면

앙지대는 원래 반구정이 위치했던 자리라고 한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하였단다.

반구정에서 바라본 앙지대
앙지대
황희 정승의 17대손인 황유주의 글 편액이 걸려 있네.
노산 이은상 글 김충현 글씨로 된 앙지대중건기도 걸려 있고, 파주군수를 지낸 우광선의 앙지대중건기도 걸려 있네.
앙지대(왼쪽)와 반구정(오른쪽)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황희선생유적지를 돌아보았다.

반구정과 앙지대 두 정자 모두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이후 개축과 증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몇 번 방문한 곳이지만 다시 가도 하나씩 더 기억해가는 재미가 있어 즐겁네.

(2023.03.11.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