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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용인] 사적 제530호 심곡서원과 조광조 묘

[경기 용인] 사적  제530호 심곡서원과 조광조 묘



사적  제530호 용인 심곡서원 (龍仁 深谷書院)

 

ㅇ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심곡서원은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ㅇ 최근 이루어진 사우와 강당의 중수 시,

각각 1636년과 1657년에 작성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으며,

심곡서원 강당기(1673년, 송시열)와 심곡서원 학규(1747년, 이재),

숙종대왕 어제(1740년, 민진원) 등이 전하고 있어

심곡서원의 역사와 내력을 알 수 있다.

ㅇ 경내에는 조광조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가 남아 있으며,

정암집 등 관련 고문서가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매년 춘추향사와 매월 삭망(朔望) 분향 의식을 거행하고 있음.

아울러, 서원 인근에 있는 ‘조광조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69호)를 통해

심곡서원의 가치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오랜만에 용인 심곡서원을 찾았다.

사적으로 지정된 후로는 처음...

 

 

심곡서원 안내도


 

심곡서원 설명


 

주말에 열린다는 낭만카페 이야기...


 

외삼문


 

정암 조광조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심곡서원.

지난 해(2015년)에 국가 사적 제530호로 지정됨.


 

보호수 앞 연못이 있는 풍경



심곡서원 외삼문과 강당



외삼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동재(거인재)



심곡서원 강당

요즘 주말에는 찻집으로도 운영되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일소당'이라는 현판을 달았던 강당...


 

서재((유의재)


 

강당 옆으로 돌아가면 만나게 되는 장서각



더 안쪽으로 사당이 있는 곳... 내삼문

 

 

 

위패를 모신 곳


 

심곡서원 현판이 달린 사당



사당 앞에서 바라본 장서각

 

 

사당 옆의 협문과 치사제



사당 뒤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다.

고목이 된 느티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운치 있는 풍경 가운데에서 책을 읽는 어떤 분...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를 듯 싶은 풍경~

우리도 가끔 여기에 들르자고 하였다.


 

사당 뒤 서원 담 안 지역의 보호수 느티나무...



사당 담 밖으로 보이는 보호수 은행나무...

주변은 정말 싱그러웠다.



장서각과 보호수가 보이는 풍경



치사제

 

 


 



교육관 산앙재

서예실로 쓰이는 모양이다.





서재가 보이는 풍경~


 

동재가 보이는 쪽에서 바라본 풍경



연지와 보호수 느티나무



향나무도 오래된 듯~



강당, 장서각, 사당이 보이는 풍경



보호수 아래 벤치에서 책을 읽어도 좋을성 싶었다.



광교산 너울길 안내도도 보이네...

서봉사지를 찾아 광교산에 올랐던 기억도 새롭게 다가온다.



심곡서원 전경



심곡서원 전경



심곡서원을 나와 인근의 정암 조광조 묘역으로 향하였다.

주변에 개망초 무리가 한밭 가득~ 


 

 

문정공조광조묘및신도비 (文貞公趙光祖墓및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169호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묘소이다.
그는 어려서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이래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한사람이 되었다.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를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노력하였지만

기성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출처 : 문화재청)



정암 조광조 묘역







정암 조선생 사세지절구(靜庵趙先生 辭世之絶句)


   애군여애부 (愛君如愛父)  
우국여우가 (憂國如憂家)
백일임하토 (白日臨下土)
소소조단충 (昭昭照丹衷)


<해설> 임금님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노라
백성 돌보기를 식구 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 주니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쳐지네

위 시는 조광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 수라고 한다.
유배지(화순 능주)에 금부도사가 도착하여 사약을 내밀자,
한성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이 절명시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고 한다.


묘의 위치를 나타낸 그림.

가장 높은 곳에 조광조 묘



정암 조광조 신도비

선조 때 세워졌으며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이 짓고,

글씨는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산해가 썼다.


문정공 정암 조선생 신도비명



문정공 정암 조선생 신도비명



위로부터 조광조의 증조부 대부터 아들 대까지의 묘역



정암 조광조 묘

묘역 가장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 묘

조광조(1482~1519)

경기도 용인 출생.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학자.

호는 정암, 시호는 문정.

조선 개국공신인 조온(태조 이성계의 생질)의 4대손.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을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짐.

사림파의 정계 진출 확립.

훈구파 세력 견제에 중종의 후원을 받으나

급진적인 개혁은 반발을 사 실패하게 되고

 전남 능주(화순)로 유배되어 사사됨(기묘사화).









조광조 묘역에서 바라본 상현마을...


2016.05.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