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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영양] 문향의 고장 2 - 오일도의 감천마을

[경북 영양] 문향의 고장 2 - 오일도의 감천마을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다.

이문열의 두들마을, 오일도의 감천마을, 조지훈의 주실마을까지...

앞서 두들마을에 들렀었고,

이어서 들른 문향의 고장은 오일도의 감천마을이다.

 

선바위 관광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감천마을이 있다.

선바위 관광지에서 산촌생활박물관을 지나고~

차로는 금방이었다.

 

감천마을은 낙안 오씨 집성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도 오희병 시인의 생가와 시공원이 있고

 마을 입구 도로변에 그를 기리는 일도시비가 세워져 있다.

인근 반변천이 휘돌아 흐르는 천변 절벽에는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연이 주는 여유와 편안함이 가득한 고장인 듯...

 

 

오일도 생가

 

일제강점기의 애국지사이자 항일 시인인

일도 오희병(1901∼1946)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그의 할아버지 오시동이 고종 1년(1864)에 세웠다.

정침은 전체 ㅁ자형으로 사랑채 앞면과 오른쪽에 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글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놓여 있다.

대문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마구간,

오른쪽에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마을에 들어서서 찾은 오일도 생가.

생가 입구에 오일도 생가에 대한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설명 안내 자료)

오일도 생가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에 위치해 있다.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인 일도 오희병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그의 조부인 오시동이 건축하였다고 한다.

오일도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릿교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에 「한가람 백사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1935년 2월에는 시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하고  5호까지 출간하여

한국현대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김광섭, 이헌구 등과 교유하였고

대표작으로는 「노변(爐邊)의 애가(哀歌)」,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등이 있다.

이 집은 크게는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ㅁ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 후기 경북 북부지방에서 나타나는 가옥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으로 보아 객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모양이고

안에 승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이 사는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ㅁ자형 주택의 글방과 사랑채가 보인다.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

 

사랑채에는 '菊雲軒'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옆 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로 통하는 문도 활짝 열려 있어서 빼꼼히 들여다 보았다.

사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ㅁ자형 형태를 보이는 가옥 구조이고

빨래가 널린 모습에서 인적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심스러워서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오일도 시인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에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분의 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내 소녀'란 시를 접한 것이 거의 다인 것 같다.

 

내 소녀

                      오일도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워낙 짧은 시여서 강렬하게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는 모양이다.

 

오일도 생가 대문채.

외양간, 방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을 마음대로 기웃거리기가 민망하여

대충 설렁설렁 돌아보고 나오는데,

안주인이 돌아오신다.

후손이냐고 여쭈었더니

바로 후손은 아니고 친척이라고 하시며

편하게 돌아보라고 하신다.

 

이어서 연세 지긋한 배우 오현경씨가 이 집안 출신이며

이곳에 몇 번 다녀갔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당시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학창시절 나의 지인이던 분의 지인 중에 오정국 시인이 있는데,

그 분도 이 집안 출신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지금 사시는 분들은 원래 서울에 사시다가 고향으로 내려오신 모양이었다.

장성한 자녀들은 미국으로 서울로 모두 나가 있고

부부만 사시니 외롭지 않냐고 했더니

'사는 게 다 그런 거지'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이미 나온 터인지라 고맙다는 인사로 가름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일도 생가를 뒤로 하고 골목길을 빠져나온다.

 

 

 

동네 골목길을 잠시 살펴보며......

생가 가까이에는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눈요기만 하고 사진은 찍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일도는 일제강점기의 애국지사이자 항일 시인이다. 

일제강점말기에 조선문인들 대다수가 친일문인으로 변조되었으나

오일도 시인은 끝내 절개를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서 올곧은 선비정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천연기념물 제114호 영양 감천리 측백나무 숲 (英陽 甘川里 측백나무 숲)

(출처: 문화재청)

마을 앞을 휘돌아가는 반변천 절벽에는 측백수가 자라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중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영양읍내에 닿았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살폈으나 쉬는 곳이 많았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시간이 맞지 않아 점심을 먹지 못했는데,

겨우 한식집 한 곳 찾아서 해결하게 되었다.

 

 

영양은 고추가 유명하니 가로등도 고추로 장식하였다.

청정지역을 나타내는 반딧불이도 매달고...

요즘은 가로등을 그 지역 특산품이나 상징하는 것들로 장식하는 게 대세다.

 

 

(출처 : 영양군청 문화관광 자료)

 

 

2014.05.06(화)

 

 

[오일도 생가]

영양군 영양읍 감천1길 34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