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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남 진주] 충절의 상징 진주성 촉석루 주변

 

[경남 진주충절의 상징 진주성 촉석루 주변

 

진양호공원을 돌아본 후 진주성으로 왔다.

진주성이라면~ 진주대첩이 떠오른다.

진주대첩(제1차 진주성전투)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진주성

진주성 촉석문

 

진주성 안내도

 

촉석문 입구 왼쪽에 세워진 변영로 시인의 '논개' 시비 

 

촉석문을 들어서서 뒤돌아보다...

 

촉석문을 들어서서 바로 보이는 삼장사 기실비.

언덕 위로는 호국의 종.

 

촉석루를 향해...

 

 

 

촉석루 (矗石樓)

진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진주성 촉석루.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출처: 문화재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이다.

 

진주성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다닐 때였고,

이후로도 몇 번 다녀간 것 같다.

 

갈 때마다 좋았던 기억...

 

 이런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어서 늘 새롭다.

 

누각 다리가 너무 인공티 나서 그게 좀 불만이긴 하지만...

 

촉석루

 

촉석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남강을 조망하는 것이 참 좋다. 

누각 안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촉석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 중 하나이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를 보통 3대 누각이라 한다.

부벽루는 북에 있고, 촉석루는 한국전쟁 때 불타서 재건한 것이라 그 의미가 좀 퇴색된 듯...

보물로 지정된 남원 광한루와 삼척 죽서루도 대단한 누각이다.

 

촉석루는 유사시 지휘본부인 남장대로 쓰였다.

 

촉석루에 기대서서 남강을 바라보며...

 

날이 뿌옇게 흐려서...

 

남강과 진주교 

 

진주 남강.

그 푸른 물을 보지 못하여 조금 아쉬운 마음...

 

촉석루 담장 안에 걸어놓은 글 중에서...

 

촉석루 담장 안에 걸어놓은 글 중에서...

 

 

의기사 (義妓祠)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의기사

 

의랑 논개의 비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 

 

논개(?∼1593)는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던 그녀의 순국 사실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단다.

일설에는 논개가 첩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경종 때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의암사적비를 세웠고,

영조 때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고종 때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고 한다.

 

잠시 학창 시절에 접했던 시를 읊조려 본다.

 

 

논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충절을 생각하며 다시 남강을 바라본다. 

 

의기사에서 촉석루도 바라본다.

저 성벽 아래로 그녀가 뛰어든 의암도 있을지니...

 

 

쌍충사적비

의기사와 담으로 이어진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두 충신을 기리는 비이다.

 

 

의기사를 나와 다시 촉석루를 본다.

의암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른쪽 끝으로 의기사와 쌍충사적비가 보인다.

 

성벽 아래로 수변 산책길이 이어지는 모습...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촉석루와 성벽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성벽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성벽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촉석루

 

 

 

 

의암 (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

(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의암

 

 

 

 

 

 

 

 

촉석루에서 바라본 의암

 

 

의암사적비와 의암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의암사적비는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이 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

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의암사적비

 

의암사적비각

 

 

 

 

 

 

남강변 성벽 주위 낙석의 위험으로 통제 중... 

 

 

 

진주교

 

 

다시 성 안을 향해...

 

 

촉석루로 다시 올라가 바깥 공간 맞은편 언덕 계단으로 오른다.

김시민장군전공비와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는 곳이다.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 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출처: 문화재청)

 

왼쪽이 김시민장군전공비이고, 오른쪽은 촉석정충단비이다.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출처: 문화재청)

 

 김시민장군전공비

촉석정충단비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모형 전시 중...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1592년(임진년) 진주대첩과 1593년(계사년) 전몰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단이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에서 바라본 촉석루

 

촉석문

 

정충단에서 내려와 촉석루 앞을 지나 쌍충사적비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쌍충사적비는 임란과 정유재란 때 전사한 두 넋을 기리는 비이다.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말(?∼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고,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등부분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튀어나온 눈을 강조하여 토속적인 느낌이 든다.

머릿돌에는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다.

그 밑면에는 국화무늬를 장식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비문에는 제말장군과 제홍록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

정조 16년(1792)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글을 짓게 하여 비를 세웠다.

일제시대 때 일본관헌에 의해 비각이 헐리어 방치되었다가

1961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비각도 새로 지었다.

(출처 : 문화재청)

 

제말장군과 제홍록의 공적을 적어 놓은 쌍충사적비

 

* 같은 비(쌍충사적비)가 경북 성주에도 있다.

이들이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인 모양이다.

 

 

이어서 공북문, 김시민장군 동상, 영남포정사쪽으로 향하였다.

 진주성과 진주박물관을 돌아보는데 두 시간  정도면 될까 생각하면서...

 

[촉석루]

* 055-749-2480

*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 진주성 내

 

2014.02.28(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