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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영주 부석사(2010.12.31.금)

 

영주 부석사(2010.12.31.금)

 

읍내리 고분벽화를 감상하고 나와 다시 부석으로 향하였다.

순흥에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금성대군 신단 등이 있지만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 다녀오려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야할 상황이라 곧바로 부석사로...

 

부석사는 사계절 경치가 모두 아름다운 절집이다.

내 기억 속의 부석사 경치 중에는 가을날 노오란 은행나무길이 이어지고

주위 과수원에서 영글어가던 붉은 사과의 조화로움이 으뜸이었었는데,

이번에 본 설경은 그것을 뛰어넘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처음 부석사를 찾은 것은 30년은 넘은 것 같다.

대학 친구들과 안동 도산서원, 영주 부석사를 거쳐

봉화 소천에서 1박을 하고

울진으로 이어지던 춘양목이 자라는 구간을 지나

울진 불영계곡, 성유굴을 돌아오던 그 코스의 일부였으니...

도산서원에서는 비를 쫄딱 맞아 생쥐처럼 되었었고,

부석사에서는 아름다운 절집 경치에 감탄을 하였으며,

봉화-울진 국도를 지나며 무성하게 우거진 소나무에 연신 감탄을 했었지.

볼거리로야 단연 으뜸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철부지 다섯명의 여자들이

그 시절에 간도 크게 봉화 소천 그 골짜기에서의 1박이라니~~~  

우리를 재워준 소천의 그 할머님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이승을 하직하셨으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부석사에 닿았다.

역시 몇번이고 와도 좋은 절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개장 전인 유물관.

시간이 촉박하여 이곳 부근까지 찻길로 올라왔다.

추억어린 길을 두고 돌아와서 조금은 아쉬운~~~

 

 

부석사의 두 개의 누각이 보인다. 앞 법고루, 뒤 안양루

 

 

경내를 올라가며 이곳저곳 풍경을 담았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동삼층석탑이 보인다.

원래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란다.

 

 

서삼층석탑도 보이고...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서탑 비스듬히 뒤로 범종각도 보인다.

 

 

법고루와 안양루

 

부석사에는 세 개의 단(하품단, 중품단, 상품단)이 있다.

그 중 이곳은 중품단에 해당되는 곳으로 가운데로 돌계단과 석축이  보인다.

법고가 안치된 이 누각은

오르며 보면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올라가서 보면 맛배지붕의 모습이다.

두 가지의 묘한 형태를 한 누각이다.

 

법고루를 지나 안양루가 보이는 풍경.

보물인 부석사 삼층석탑의 모습도 살짝 보인다.

 

 

이곳이 상품단에 해당되는 곳으로

법고가 안치된 누각을 지나 안양루를 거치는 세 계단을 오르면 무량수전에 다다르게 된다.

 

부석사 석축

 

안양루 아래에서 계단을 오르며 본 무량수전과 석등의 모습~

 

무량수전과 석등

 

무량수전과 석등

 

무량수전 내부의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은 감히 찍지 못하였다.

다만 그 빛나던 모습만을 머릿속에 간직해왔을 뿐...

대신 무량수전 서편의 안내문으로 위안을~

 

 < 부석사 누리집 사진 >

< 안내글 > 

 

 

안양루와 석등

 

 

무량수전 앞 마당에서 내려다본 풍경들~

 

 

 

 

 

보물인 부석사 삼층석탑과 국보인 석등이 보이는 풍경

 

삼층석탑을 지나 조사당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본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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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과, 석등, 조사당, 삼층석탑 등은 따로 다음 장에 싣기로 한다.

 

 

아내 내용은 부석사 홈페이지에서 찾은 자료이다.

 

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 초기 >

중국 유학 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다.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 중창 >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하여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 17호인 석등이 경문왕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 고려 이후 >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기타 고려 때 많은 부석사의 건물들이 중창되거나 창건 되기도 하였다.

 

< 조선시대 >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 근대 이후 >

일제 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2010.12.31(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