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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광주 전라

[전북 장수] 논개의 고장 장수 나들이 4 - 장수향교와 정충복비

[전북 장수] 논개의 고장 장수 나들이 4 - 장수향교와 정충복비


<장수 나들이 >

논개생가와 기념관 (+도깨비 전시관) - 주촌마을(논개생가마을)

- 논개사당 (+의암호) - 장수 향교 (+정충복 비)

- 창계서원 - 타루비 - (장수 1박) - 어서각

 


장수향교



입구 왼쪽에 하마비가 보이고,

오른쪽에 장수향교비가 서  있는데,

차들이 가리고 있어서 잘라서 찍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운데로 부강문이,

왼쪽으로는 장수향교육백주년기념비, 향교이건사적비 등의 비들이 보인다.


 

향교이건사적비



장수향교 부강문(扶鋼門)

장수향교의 외삼문으로 부강문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란다.

 


 本聖域勿犯

‘이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라는 신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이던 왜군이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하자

향교지기 정경손은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며

목숨을 걸고 항거했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왜장이 오히려  "이 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며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이라는 신표를 써 주어

장수향교를 지금껏 보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장수향교 부강문과 정충복비



 

정충복비(丁忠僕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

장수읍의 향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시대 중기 사람인 정경손의 의로운 뜻을 기리고 있다.

정경손의 호는 충복으로,

임진왜란 당시 향교 내의 문묘(文廟)를 지키고 있었는데,

왜적의 한 부대가 이곳 장수지역에 침입하여 문묘에까지 이르자,

문을 굳게 닫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하기를,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들라”하였다.

이러한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태도에 감복한 왜적들은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

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으며,

대부분 불에 타버린 다른 지역의 향교들에 비해

이곳만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의로운 기개를 거룩히 여겨

이 자리에 비를 세워 두었다,

비각 안에 있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헌종 12년(1846)에 세웠다.

(문화재청 자료)

 

 

 

정충복비=성충복정경손수명비


 

정충복비의 뒷면


 

정충복비 비각


 

 

정충복비각과 충효당




정충복비 비각 옆으로도 향교로 통하는 작은 문이 나 있다.



부강문이나 정충복비 오른쪽의 작은 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에 명륜당이 앉아 있다.


 

 

명륜당은 향교의 강학 공간이다.

명륜당 안쪽 공간 가운데로 내삼문이 보이고,

양쪽으로 동서재가 보인다.


 

장수향교 명륜당의 열린 공간을 통해 대성전쪽을 바라본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의 서재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의 동재


 

 대성전 주변은 정비 중이었다.

 

 

 

장수향교 대성전 앞 내삼문


 

 

장수향교 대성전 (長水鄕校 大成殿)

 

 


 

장수향교 대성전 (長水鄕校 大成殿)

 

보물  제272호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문화재청 자료)

 

 

 

 

대성전 주변은 온통 공사 중이었는데,

정비가 끝나면 더 당당한 모습으로 보이겠지...



네 귀퉁이의 걸쳐진 작은 기둥이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이제껏 많은 향교를 보아왔지만

저런 형태의 기둥은 처음 본 것 같다.



전란의 화를 입지 않은 장수향교 대성전.

장수향교 설명판에는 정유재란,

문화재청 자료에는 임진왜란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 전란을 통틀어 임진왜란(1592~1598)...






튀어나온 작은 기둥이 신기해서 이리저리 몇 장 찍어보았다.


 




장수 향교 대성전~

정경손의 충성심이 지켜온 세월의 무게...



대성전 옆에서 본 내삼문



'本聖域勿犯'

정경손의 의로운 마음 때문에 전란의 화를 입지 않았던 장수향교 대성전.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장수향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를 만나게 되어 참 가슴 뭉클했다.


2016.05.05(목)


<장수향교>

전화번호 : 063-350-2224

063-351-7945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