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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광주 전라

[전북 전주]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전북 전주]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문화재청)

 

경기전 하마비와 정문

 

 

 

전주 경기전 하마비 (全州 慶基殿 下馬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경기전 하마비(慶基殿 下馬碑)는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1614년(광해군 6)에 처음 세워졌으며,

1856년(철종 7)에 중각(重刻)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경기전 하마비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경기전 정문

 

 

홍살문

 

 

경기전 외삼문

 

 

경기전 내삼문

 

 

 

전주 경기전 정전 (全州 慶基殿 正殿)

 

보물  제1578호

 

사적 제339호의 전주 경기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1442년(세종24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태조영정 보물 931호)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 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신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문화재청)

 

보물 제 1578호 경기전 정전

 

 

태조 어진과 설명

정전의 어진은 촬영금지라 이 사진으로 대신하고...

 

 

 

 

정전 배례청 지붕의 거북이상.

장수의 상징인 거북을 배치함으로써 화마 등으로부터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마음을 담았다.

 

 

경기전 정전

 

 

정전 앞에서 바라본 내삼문

 

 

 

 

예종대왕태실및비 (睿宗大王胎室및碑)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

 

이곳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胎)를 묻은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연대를 앞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 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이 태실과 비는 왕실에서 태를 처리한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예종 태실비와 태실

 

 

 

 

예종 태실과 비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기적비

 

 

 

 

조선 전기의 4대 사고, 조선 후기의 5대 사고지를 나타내는 지도

 

 

예종과 세조실록

 

 

단종과 문종실록

 

 

세종과 태종실록

 

 

정종과 태조실록

실록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실록이 소실될 위험에 처하자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기게 된다.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유신, 수직유생 안의와 손홍록의 공로가 컸다고 한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어쨌거나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이 있어

조선 전기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느낌...

 

 

 

 

조경묘 (肇慶廟)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이 사당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으로부터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시조 내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문화재청)

 

 

 

 조경묘.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어진박물관

 

왕의 어진을 봉안한 왕의 초상 전문 박물관으로

태조어진을 비롯해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전시되고 있다.

 

어진박물관

 

 

 

 

 

 

* 아래 어진실1, 2 자료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어진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어진실1

 

 


1872년/비단에 채색/220×151㎝/국보 317호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진본이다.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으로,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에 큰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어진실2

 






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모사
세종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세종어진은 김영철화백이 표준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군주이다.

성군으로 칭송되는 세종은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1900년/비단에채색/83x203cm/보물제932호
1744년 영조 51세 때 사대부 화가 조영석 등이 그린 어진을

1900년(광무4년) 조석진·채용신 등이 모사한 영조 반신상이다.

현재 어진실Ⅱ에 있는 영조어진은 1900년의 반신상 어진을 토대로 하여

김영철 화백이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영조는 31세에 왕위에 올라 83세까지 장수한 최장수 왕이며

재위기간(52년)이 가장 길었던 왕이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전개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뒤에 위치한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한 것이다.

 


 


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복제
정조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정조어진은 이길범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여기 어진실의 정조어진은 표준영정을 촬영한 사진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탕평정치를 전개해 붕당의 폐단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포부를 갖고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현대/비단에 채색/114×164㎝/복제
철종어진 진본은 1861년(철종 12) 이한철ㆍ조중묵 등이 그린 것이다.

융복(군복) 차림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어진이며,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다.

1954년 부산 보관창고에 불이나 오른쪽 화폭의 1/3쯤 소실되었다.

여기 어진실의 철종어진은 복원된 어진을 촬영한 사진이다.

불에 탄 1861년의 철종어진(보물 1492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고종어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전의 조선 왕들과 달리 황제복인 황룡포 차림이다. 신정왕후(조대비)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고종황제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폐위되었다.

1919년 승하하였으며, 고종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순종어진이다.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이다.

장복(곤복)은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황제는 십이장복, 왕은 구장복이다.

십이장복이란 명칭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순종 장례날인 6월 10일을 기해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실


 

 

 

 

영조 때 풍남문에 걸려 있었다는 '명견루' 편액 

 

 

 

 

 

 

 

 

 

 

 

가마실

 

 

 

 

 

 

 

기획전시실

 

 

 

 

 

 

 

 

 

 

 

 

 

 

 

 

황산대첩도

 

 

 

포토존

 

 

태조어진 봉안 반차도

 

 

 

부속 건물

 부속 건물 배치도

 

 

 

 

 

 

 

 

 

 

 

 

 

 

 

 부속 건물은 각종 체험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경기전을 두루 돌아본 후

잠시 전동전당, 풍남문, 전주객사를 돌아

담양 명옥헌원림으로 향하게 된다.

 

2015.07.26(일)

 

[ 경기전 ]

전화번호 : 063-281-2790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