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익산 함라마을 삼부잣집(조해영, 김안균, 이배원 가옥)과
옛 담장 (益山 咸羅마을 옛 담장)
함라면 소재지에 들러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였다.
면 소재지이니 먹을 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시골이라 그런지 영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한 곳을 골라 들어갔고,
집이 서글프긴 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배도 채웠고 다시 길을 나선다.
함라마을 옛 담장과 삼부잣집을 보러...
지금의 함라면은 조선시대 함열현의 관아가 있던 중심지였다고 한다.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함열역이 와리(현 함열읍)에 들어서면서 그 주변이 함열읍으로,
옛 함열현 일대인 이곳은 함라면으로 되었단다.
함열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왜 이곳이 함열리인가 의아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함라면의 중심인 이곳 함열리에는 약 650년이 된 수동마을이 있다.
함라노소, 3부잣집 등이 있는 이곳...
함라파출소 골목길로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댔더니 함라마을 담장 소개를 한 돌비가 보였다.
익산 둘레길을 소개한 지도도 보였고...
바로 앞으로 삼부잣집 중 한 곳인 조해영 가옥이 보였다.
조해영 가옥 (趙海英家屋)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안채 1동과 별채 1동, 문간채가 남아 있는데 원래 안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건물에 기록된 글로 미루어 1918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채와 별채는 둘 다 남북으로 길게 평행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남쪽을 향하고 있고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에 둘러 쌓인 지역을 빼고는 담도 없이 거의 텃밭을 경작하고 있다.
별채 동편 울 밖에 김육(1580∼1658)의 선정비가 서 있고 울 안에 2개의 비가 가로 놓여 있는 것을 볼 때, 집 가까이에 비석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문화재청)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조해영 가옥
김육 불망비.
이 비석의 건립년대는 조선 효종 때라고 하며 영의정을 지낸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라고 한다.
김육은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하였다고 하며, 이 비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란다.
사랑채
안채
장독대
안채 팔작지붕의 꽃장식이 예사롭지 않다.
안채 옆 담장의 이 벽화를 보노라니 문득 경복궁 자경전 담의 십장생 굴뚝이 떠올랐다.
이런 장식을 할 정도라면 상류층 가옥임에 틀림없을 듯...
잠겨 있는 이 문이 정대문...
사람이 살지 않아 방치된 모습이 안쓰럽다.
누마루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잔설이 있어 더 쓸쓸한 풍경이 되게 한다.
참 멋진 가옥이었는데, 내부를 너무 돌보지 않은 느낌이랄까~~~
사라져가는 옛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 시간...
옆 골목길
조해영 가옥.
사람의 손길이 멈춘 듯한 고가는 쓸쓸하였다.
조해영 가옥에 이어서 김안균 가옥쪽으로 이동...
김안균 가옥은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다.
김안균 가옥 (金晏均家屋)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3호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57
건물에 적힌 기록(상량문)으로 보아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다.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김안균 가옥의 긴 행랑채가 가옥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하였다.
집의 규모에 비하면 문이 소박한 편...
정려각.
담의 재료가 다양하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었고, 정려각 담 너머로~
주인이 이곳에 살지 않아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던 김안균 가옥
이배원 가옥 (李培源 家屋)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7호
이 집은 현재 주인인 이서영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초창(初創) 하였는데, 건축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담장과 대문 일부만이 남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사이에 내담을 두고 복도를 설치하여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1959년 사랑채를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하면서 분리되었고, 현재 대문 좌측에는 창고가 있는데, 이는 증조부가 살던 초가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배원 가옥은 그의 부친(이석순)이 누룩사업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함라면의 부농(만석꾼)으로 성장하였고, 또한 삼성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전북축산의 대주주였으며, 황등산업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장자인 이집천은 교육사업가이자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다른 3부자의 집과 마찬가지로 만석꾼이면서 자선사업을 펼쳐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채의 평면은 방과 대청, 부엌으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는데, ㄱ자 형태이며, 구조는 장대석 기단위에 치석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향 기둥을 세운 다음 도리로 결구하고 있음.공포는 물익공 양식이고, 창방과 장여사이에는 소로가 끼여져 있으며, 가구는 대청 상부는 1고주 5량가이고, 방과 대청이 접하는 부분에는 2고주 5량가임. 지붕은 팔작지붕을 ㄱ자 형태로 꺾어 연결하고 있다. 사랑채는 역시 안채와 같은 구조이나, 누마루가 발달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이배원 가옥 안채(왼쪽)와 사랑채(오른쪽).
이배원 가옥은 함라마을 삼부잣집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며 앞서 돌아본 조해영 가옥과 김안균 가옥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왼쪽 안채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랑채는 현재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 중이었다.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배원 가옥 사랑채
이배원 가옥 옆 담장
돌아본 삼부잣집에서는 흉년이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내어주었다고 하며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하였단다.
이배원가의 이집천은 교육사업가로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고
서벽정이라는 별장을 지어 풍류객들이 찾게 했단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만한 당대의 소리꾼들인 임방울, 박초희, 박동진 등이 이곳 함라를 거쳤다고 하니 이곳 함라마을 삼부잣집의 인심을 절로 알게 된다.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益山 咸羅마을 옛 담牆)
등록문화재 제263호
마을 형성 시기에 건립(추정)
함라 마을의 옛 담장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섞여 있고,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 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314 등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은 담장...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삼부잣집과 마을 담장길을 둘러본 후 동네를 조금 더 돌아보았다.
동네 윗쪽으로 올라가니 옛 함열현 관아터도 보였다.
이곳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귀양 와서 머물기도 한 곳이라고 한다.
허균은 함열(현 함라)에 귀양 중일 때 '도문대작'이라는 글을 썼다고 하며
'도문대작'은 식품과 식재료에 대한 품평서란다.
도문(屠門)은 소나 돼지를 잡는 푸줏간의 문이고, 대작(大嚼)은 크게 씹는다는 뜻...
'푸줏간 문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는 의미로
그의 저서인 '성소부부고'에 실려있다고 한다.
이곳은 옛 마한의 땅으로 조선시대에는 함열현의 관아가 있던 중심지였다고 한다.
동네 가운데 돌담길을 따라 더 걸어보았다.
함라노소를 만났다.
지금은 경로당으로 쓰이는 듯 보였다.
안쪽으로는 좀 오래된 집채가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연못도 보였다.
함라노소는 함라향약당으로 1682년에 개설했다고 하니 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고 한다.
300주년 기념비가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다.
함라는 참으로 굵직한 역사를 지닌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함라노소를 나와 다시 향교쪽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옆지기가 귀찮아 하니 추운데 혼자서 걷는 길이 조금은 썰렁하다.
교동(향교동)이라는 동네이름이 쓰인 돌비가 서 있다.
향교가 있던 동네이니 교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이배원의 큰 아들인 이집천이 함열향교 옆 함라산 자락에 지은 별장이 서벽정인데,
이곳이 그 자리인가 싶었다.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는데, 앞으로 복원할 모양이다.
함열향교(咸悅鄕校)
처음 지어진 시기는 조선 세종 때라고 한다.
함열향교대성전 (咸悅鄕校大成殿)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5호
함열향교는 조선 세종 19년(1437)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재위 1724∼1776) 때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함열향교 :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579
(출처 : 문화재청)
향교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고 있었다.
몇년 후면 마을도 더 정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코스인 웅포면의 입점리 고분군으로 향한다.
2013.12.3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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