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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부산 대구 경상

[경북 칠곡] 6·25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낙동강 칠곡 왜관철교 (漆谷 倭館鐵橋)

[경북 칠곡] 6·25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낙동강 칠곡 왜관철교 (漆谷 倭館鐵橋)

 

 

지난 1월 중순, 시아버님 기일이라 남녘으로 내려간 김에 잠시 왜관에 들렀다.

왜관은 내 어릴적에 고향과 대구를 드나들 때 늘 오가던 길목이었다.

왜관 다리는 6·25 당시에 폭격으로 인하여 그 허리를 끊기었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었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무시무시한 6·25 이야기가 담긴 그곳...

당시에 왜관철교가 있는  주변의 이 낙동강물은 온통 핏빛이었다고 한다.

다리가 끊기자 강을 건널 수 없는 사람들이 소꼬리를 잡고 건너기도 했다는 이곳...

한국전쟁 당시 대구와 부산을 포함하는 경상도 지역만을 남기고 후퇴했을 때

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써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칠곡 왜관철교 (漆谷 倭館鐵橋)

 

등록문화재  제406호

­한국전쟁 때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미군 제1기병사단에 의해 경간(徑間) 1개가 폭파됨으로써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역할을 한 유적이다.
콘크리트 교각으로 화강암을 감아 의장이 화려하고 지면에 닿는 부분을 아치형 장식과 붉은 벽돌로 마감하는 등 근대 철도교에서 보기 드물게 장식성이 높다.

*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적로 39, 외 교량 1기, 연장 469m, 면적 2,869.8㎡ (석전리)

(출처 : 문화재청)

 

칠곡 왜관철교

 

 

 

 

 

 

복원된 왜관철교...

왜관쪽 두번째 교각 부분의 상판이 폭격으로 떨어져 나갔었다고 한다.

 

 

 

 

 

 

 

 

 

 

6.25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들의 도움 상황을 표시해 놓았다.

 

 

 

유엔 참전 전투부대 지원국들

 

 

 

 

 

 

 

 

 

 

 

 

 

 

 

 

 

 

 

 

 

 

 

 

 

 

 

 

 

 

유엔 참전 전투부대 지원국들

 

 

 

유엔 참전 의료 지원국들

 

 

 

 

 

 

유엔 참전 의료 지원국들

 

 

 

왜관철교

 

 

 

 

 

 

 

 

 

 

6·25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낙동강 칠곡 왜관철교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1905년에 개통한 군용철도의 교량이다.  6.25 전쟁 때 적의 도하 방지를 위해 1950년 8월 폭파하였다가 그후 복구하여 인도교로 이용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는 1901년 8월에 착공하여 한국 노무자와 학생들을 동원, 3년여만에 445㎞의 단선(單線)을 완공하고 1905년 1월 1일에 개통, 부관연락선(釜關連絡線)으로 일본과 연결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군수물자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경부선 423㎞를 복선화(複線化)하면서 1941년 11월 30일 507m의 새로운 복선철교를 상류쪽에 가설하고 이 철교는 경부간 국도의 인도교(步車道)가 되었다.
6·25전쟁시 적 도하 방지를 위해 1950년 8월 3일 폭파된 경간(經間)은 그 해 10월 총반격 때 침목 등으로 긴급 복구한 이후 계속 인도교로 활용해 왔다. 1970년 11월 바로 위쪽에 경부간 국도의 왜관교(길이510m, 폭13.5m, 높이7.2m 시멘트콘크리트조)를 새로 가설한 후에는 인도교로 이용했으나 그간 복구 부분이 너무 노후하여 1979년 11월부터는 통행을 전면 차단하였다.
이 다리는 관리하는 철도청에서는 철거를 검토하였으나 호국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이 다리를 보존하자는 郡民들의 의사를 수렴, 칠곡군이 무상관리 승인을 받고 91년 8월부터 93년 2월까지 6억1천만원(도비4억, 군비2억1천만)원을 투입하여 교각 1기 신설, 상판 63m 복구, 트러스 도색, 난간보수, 교면 및 접속도로를 포장하여 복구함으로써 '호국의 다리'로 명명되어 전쟁과 호국의 산 교육장으로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人道로 활용되고 있다. 이 다리가 어떻게 하여 호국의 다리로 불리게 되었는지 6·25전쟁시 왜관 일대의 전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대구와 부산이 함락 위기에 놓였던 1950년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워커라인, 낙동강 교두보)을 구축하고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곳 왜관 일대는 그 중심지였다. 이에 따라 그 해 8월 3일 왜관 전 주민의 소개령(疏開令)이 내렸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 도하방지를 위해 8월 4일 새벽까지 모두 폭파되었는데 이 때 왜관 인도교도 폭파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왜관(자고산, 303고지) ~ 현풍까지 40㎞(하천거리 56㎞)구간을 담당하던 미제1기병 사단장 게이(Hobert Raymond Gay) 소장은 휘하 부대가 김천에서 왜관으로 철수 완료하면 작전상 한강교와 버금가는 왜관 낙동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전차를 앞세운 적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낙동강 연안의 왜관에는 김천~대구간 4번 국도를 잇는 유일한 인도교를 통해 많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붐볐다. 7월 중순까지만 해도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있었는데다 하순부터는 하루에도 25,000명 이상이 낙동강을 건너 좁은 아군지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길을 메워 군의 작전 기동력에 장애도 되고 특히 적 게릴라들이 피난대열에 끼어 들어와 아군을 교란시키는 사례가 많았다(유엔군은 당시 게릴라 총병력을 약 3만, 핵심 조직요원은 5천명으로 판단했으며 8, 9월중 4천명을 소탕했다). 이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에는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해 부득이 진지점령에 앞서 강안(江岸)으로부터 8㎞ 이내에 거주하는 전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8월 3일, 아침부터 경찰서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과 확성기로 '오후 6시까지 지시된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한다.'라는 내용을 포고하자 왜관 일대 주민들은 황망히 피난짐을 쌌다. 이날 따라 왜관역에는 마산으로 이동하는 미제25사단 병력수송열차가 들어서 있었다. 때때로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화차에 타기도 하면서 봇짐행렬이 줄을 이었다.
유엔군은 피난민들이 인도교를 건너 소개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게이 소장은 다리 근처에서 부대철수를 지휘하고 있었다. 인도교 건너편에는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도강기회를 보고 있다가 3일 해질 무렵 뒤편의 미제8연대가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려 하자 뒤따라 몰려왔다.
사격위협을 해도 필사적으로 따라 오는데는 어쩔 수 없어 폭파시기를 놓쳐버렸고 그 사이 날은 저물어 드디어 적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폭파시기 판단은 게이 소장의 생애 중 가장 어려운 결단이었다. 1950년 8월 3일 오후 8시 30분, 굉음과 함께 인도교와 복선철교 각 1구간이 폭파되었다. 어둠이 짙어진 밤하늘에는 불꽃놀이 하듯 파편이 날면서 트러스와 상판이 무너져 내렸는데 총길이 469m중 왜관쪽 둘째경간 63m가 끊어졌다.
뒤에는 적이 밀려오고 막다른 처지에 몰린 피난민들은 수심이 얕은 곳으로 몰려 갔다. 짐스러운 것은 버리기까지 하면서 군의 제지를 피해 강을 건넜는데 등에 업은 아이가 익사하는 줄도 모르고 건넌 부녀자 등 정신없이 강을 건너는 가운데 희생자가 많이 속출하였다. 적은 전차가 건너올 수 없어 일단 강 서편에 집결하고 미제1기병단은 8월 4일 아침까지 강 東岸에 진지구축을 완료했다. 이후 적은 모래 가마니를 깔아 전차 도하를 여러번 시도했으나 아군의 포격으로 번번이 좌절되었다. 8월 16일에는 B29 전투기 98대가 강 건너편 일대 67㎢에 26분 동안 90톤이나 되는 폭탄을 떨어뜨려 인민군 4만명중 3만여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융단폭격 작전으로 세계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왜관을 빼앗길 경우 대구는 북한군의 야포 사정권 안에 들게 되며 부산까지 밀리게 되므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다부동전투와 함께 필사적으로 전선을 지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칠곡군은 '호국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살기좋은 고장으로 발돋움해 있다.
(출처 : 칠곡군청 문화관광 자료) 
 
 
방문: 2014.01.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