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가 어린 서울 삼전도비
오늘은 모처럼 따사로움이 가득한 봄날이었다.
오후 시간이 나서 석촌호수 옆에 위치한 삼전도비를 찾으러...
오래 전에 찾았을 때는 주택가 놀이터에 있었는데, 천덕꾸러기 신세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보여 주는 그 비석이 무에 그리 대단할 것인가!
그러다보니 찾는 사람도 없고...
그동안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였었다.
2년 전에야 제자리를 찾아 옮기게 되었는데,
원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 석촌호수 속인지라 가까운 언덕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서울 삼전도비 (三田渡碑)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크기로 보면 세계적으로 겨누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규모의 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것을......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을 또 접한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면서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형제의 관계를 맺은데 이어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친명배금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것...
1636년(인조 14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청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왔고,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는 혹한과 식량 부족, 강화 함락 등으로 50일을 넘기지 못 하고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이 삼전도비가 세워졌다(1639년). 높이 3.95m, 폭 1.4m.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여이징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제목을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사적 제 101호.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 소재
삼전도비 옆에 나란히 있는 비신 없는 이 귀부는 현재의 것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진 것인데,
더 큰 것으로 요구하던 청나라측의 요구로 폐기된 것일 거라는 추측을......
2012.03.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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