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세계/일본

일본 구마모토성

일본 구마모토성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으로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라고 한다.

성 주변에 있는 은행나무로 인해 긴난성(은행성, 銀杏城)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15~16세기에 구마모토 성(隈本城)이 있었으며,

16세기말~17세기에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기존 성을 정비해

새로이 구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조했다고 한다(1607년 완공).

이 성은 일본 제일의 명성으로 평가 받기도 하는데,

성의 특징은 세쇼류(清正流)로 불리는 석벽 위에

대소천수, 망루 등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석벽은 아래서부터 점차 급경사를 이루며 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무샤가에시(武者返し)로 불리고 있다.

성주가 가토 가문에서 호소카와 가문으로 교체된 후에도

성의 건물 및 구조 등은 변함없이 옛 모습을 지켰지만,

메이지(명치) 시대 구마모토 성에 군대가 주둔한 후

성의 구루와 및 건물, 석벽이 철거 또는 변형되었고,

세이난 전쟁으로 천수를 포함 주요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우토 망루와 히가시타케노마루의 망루군(櫓群) 등이 남아 있고,

석단 쌓기의 명수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석벽은

거의 대부분 성이 축조될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개축된 곳도 몇 있는데,

1960년부터 대소 천수를 포함 일부 망루 외관이 복원되었고,

2007년 축성 400년에 맞춰 주요 건물의 원형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축성 350년을 맞아 천수가 재건되었다고 한다.

천수각의 모습.

 

 

주차장에 내려서 처음 본 풍경 

 

 

안내도를 스윽 훑어보고...

 

해자를 지나 성벽을 보며...

 

 

 

서문 입구 오른쪽

 

 

서문 입구

 

 

매표소

 

복원정비예상도

 

입장 구역

 

 

 

 

고로의 돌


요로테 고로의 아버지인 기야마 단조는 농민폭동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로는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 복수를 하려고 축성 인부로 구마모토성에 들어갔으나

계획이 미리 탄로나서 우물에 생매장되었다고 한다.

이 돌은 고로가 목에 걸쳐 옮겼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천수각, 뒷쪽에서 본 모습

 

천수각, 옆쪽에서 본 모습

 

천수각, 앞쪽에서 본 모습

 

 

 

대천수각

 

소천수각

 

아랫쪽 입구에는 전통 무사 복장을 한 사람 둘이 양쪽에서 지키고 있다. 

 

입구쪽에서 내려다본 바깥쪽과 통하는 통로의 모습

 

성 안 천수각에 올라 내려다본 주변 풍경들

 

 

 

 

 

 

 

 

 

 

 

 

 

 

 

천수각을 나오며 

 

 

천수각 입구에 버티고 선 전설어린 오래된 은행나무

 

구마모토성은 은행성이라고 불린다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성내에 심어진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단다. 축성 당시에 농성전을 대비해 식량확보를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은행을 심었다고 한다. 또, 기요마사는 성 안의 다다미를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고구마줄기로 만들어 농성전을 대비했다고 한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울산성 전투의 교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이 은행이 천수각만큼 자랐을 때 이 성에서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세이난전쟁>이라고...  실제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은행나무의 키가 천수각과 높이가 비슷했다고 한다.

 

* 울산성 전투의 교훈 : 임진왜란 때 울산왜성은 포위공격에 의한 보급과 식수수급 차단에 취약하였으므로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한 일본군은 이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았다. 이 전투에서의 피해는 전투에서 군량과 식수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울산왜성의 취약점이 구마모토성 건조에 참고되었다고... 구마모토 성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확보가 용이하도록 성내에 120여 개의 우물을 확보하고 실내의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의 대비책을 마련한 것.

 

 

 혼마루 어전과 은행나무

 

 

성 안의 혼마루 어전

 

축성 350주년 즈음하여 혼마루 어전을 복원했다고 한다.

숯불을 피워 난방을 한 흔적이 보인다.

 

 

혼마루 어전 안에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왕소군 그림이 있는〈쇼쿤노마(昭君之間)〉라고 불리는 방이 있다.

이 방에는 밖으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가 있다고 하며, 번주의 거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설에 따르면, 유사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라나...

이곳은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으면 촬영이 가능하다.

 

 

말을 탄 여인이 왕소군이라고 한다.

 

 

천장 부분

 

성을 돌아나가며...

 

 

통로 구역

 

통로를 빠져나가며

 

 

 

 

 

 

 

구마모토성은 아주 튼튼한 성이었다.

이 성은 임란이 끝난 후 축성되었는데,

축성 당시에 수많은 우물을 확보하였고

다다미방을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으며

겹겹이 둘러싼 방어 시설 등이

내가 보기로는 오사카성보다 더 튼튼한 구조인 것 같았다.

이 성의 축성자 가토 기요마사는 우리에게 가등청정으로 잘 알려진

임진왜란 때 선봉 왜장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가신이었고

임란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가신이 되었으며

구마모토의 초대 번주가 됐다.

어쨌든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 나라에 많은 고통을 준 왜장이다.

 

2011.02.23(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