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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2007.12.21 강화도(07팀)

2007.12.21 강화도

 

 강화도로.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며... 가는 길 주변, 많이 발전된 모습... 초지대교가 생겨 강화도 접근이 더 쉬워졌다.
 광성보... 쌍충비,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등 한 바퀴. 겨울답지 않은 포근함에 나들이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전등사로. 전등사 대웅전 처마 끝엔 벌 받는 여인의 모습이 사방 돌아가며 있어 의아심을 갖게 한다. 나부라고도 하고 원숭이라고도 하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나부상이라는 의견이 더 많단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고, 불사를 끝내면 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편수는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으나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고,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정족산성 한 바퀴. 복원된 정족산사고를 지나 삼랑성 정상으로. 정상이 가까워지자 하늘이 가까이에 잡힐 듯 다가왔다. 마음이 탁 트인 느낌... 구름이 드리워진 마니산도 보고, 사진도 한 컷. 정상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상큼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역시 도회의 오염된 공기와는 질이 다름을 느끼고... 하산. 산성 길 밟지 않고 경내 찻집에 머물던 동료들과 합류.
 외포리로. 바다... 갈매기... 바다 위로 지는 석양... 시원한 바람... 바닷가 횟집에선 모든 게 회 위주. 양이 너무 많아서 우리 팀은 다 먹지도 못하였다. 매운탕이 얼큰하니 속을 풀어주어서 좋았다.

   석모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에 한 번 들어가고 싶었다. 오랜 전 가족과 함께 들렀던 추억의 민박집과 보문사가 생각났기 때문.
서울로. 기사분이 영화 '밀양'을 틀었지만 보다가말다가... 모두들 얘기하거나 자거나... 노래 부르라든가 하는 일이 없어서 넘 좋았다. 서울에 도착한 후 우리 팀은 2차로 뒷풀이하러 유객주에 갔다. 사정이 있어 못 간 사람들 합류하고... 맥주 피쳐 2000cc 시켜서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얘기 나누다가 10:30 집으로.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전등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정족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