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일 = 2005년 7월 25일 >
아침 8시, 북경소림무술학교를 향해 출발. 일반 학교를 방문하려 했으나 중국에도 여름방학인 관계로 이곳을 볼 수밖에 없었음. 북경의 외곽인 듯한 곳, 아파트촌을 지나 비포장의 구불한 길을 몇 백m 돌아 다다른 곳이 북경소림무술학교. 초등부터 대학까지 약 1,000명의 학생이 기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방문자를 위해 탈춤도 보여 주고 학교 내부까지 자세히 공개하며 안내해 주었다. 기숙사 건물 1층에 전시된 것들 중 강타와 보아 사진(그림이라고 해야 하나?)도 보이고. 교실은 우리 나라의 80년대 정도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 모택동과 사마천, 베토벤, 아인슈타인 등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운동장 트랙을 도는 학생들, 늘어선 철봉에 다리를 올리고 유연성을 높이는 학생들, 무술 동작을 익히는 학생들의 모습이 가는 곳보다 보인다. 우리 나라 학생들 보다가 봐서 그런지 꾀죄죄한 게 영락없이 우리네 7~80년대 느낌이 들었다.
다음 코스는 명 13릉 중 정릉. 정릉은 명 황제 주익균(신종, 만력제)의 묘로 지하 27m에 건설된 지하궁전이다. 만력제는 살아서 4번이나 자기 무덤에 놀러왔었단다. 입구의 회나무가 용머리발톱을 연상시키며 반긴다. 무덤의 서쪽으로 돌아가는데 시신이 들어갔다는 시구가 보인다. 시구의 바닥과 벽, 아치형 문은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다. 본 무덤 입구를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니 좌실이 먼저 나타났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음을 말해 주듯 벽에는 습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좌실은 황후를 안치할 목적으로 마련한 자리였는데, 발굴 결과 세 사람(만력제와 두 황후)이 후실의 가운데에 나란히 매장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좌실의 가운데에 金井이란 구멍이 있었는데, 쉽게 말하면 묘자리로 점찍은 곳을 나타내는 증표로 처음 점찍은 곳의 흙을 보관한 장소. 우실은 좌실과 같은 규모이나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실 가운데에 주익균의 관, 양 옆으로 두 황후의 관, 그 바깥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둔 사물함이 놓여 있었다. 정전엔 황제보좌와 남쪽으로 황후보좌가 앞뒤로 놓여 있었다. 보좌는 백옥을 사용해서 조각하였는데, 주익균 보좌엔 용무늬(용이 황제를 뜻함), 두 황후의 보좌엔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9년 전 방문했을 땐 보좌가 깨끗하게 보존이 돼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많이 상해 있었다. 깔끔하고 웅장해 보이던 보좌가 너무 더러워져 있어서 처음 보고 감탄했던 느낌이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그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방문에 찌든 탓이리라. 수백 년 전의 무덤이 지금의 중국에 수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회가 되고 있으나 언젠가는 사람들을 거부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또 다른 무덤인 만리장성을 향해 달린다. 팔달령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이 그 동안 북경 시내와 호화호특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다. 산에 제법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계속 나무심기 진행 중이므로). 팔달령에 다다르니 날씨가 은근히 무덥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총연장 6,4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이란 명대의 장성만을 지칭한단다. 가지까지 장성 전체를 말하자면 105,000리에 달한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의 10리는 5km라나(가이드 말에 의하면). 현재까지 복원, 개방되어 있는 장성 중 가장 높은 곳이 팔달령. 우리가 간 곳이 팔달령이었으니 장성의 최고봉에 오른 셈이었다. 케이블카로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 10여분 정도만 걸으면 팔달령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이 꼭대기에 누가 쳐들어온다고 성을 쌓았냐? 미친 짓 했다.", "그 꼭대기에 케이블카를 놓은 놈도 똑같으니 그 또한 미친 짓이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모두 웃음바다가 됐다. 서양 어느 여인은 이 장성 전체를 걸어서 완보하였다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는 장성이기에 일행은 그 벽에 찜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깔렸던지 수 백 미터 멀리까지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한국인들 정말 많아요. 잠시 장성에 기대어 그 옛날 성을 쌓다 죽어갔을 이름 없는 사람들의 넋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도 생각해 보았다. 성벽 바깥은 돌과 벽돌을 사용하였지만 내부에는 흙을 넣었다나. 성 쌓다 죽어간(돌 한 더미마다 한 사람씩 죽었을 거란다) 이들의 시체도 그 곳에 같이 묻었을 거라는 안내원의 설명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장성을 돌아내려오는 길은 마음이 무겁기조차 하였다.
다시금 버스에 오르고. 안내원은 용경협 자랑에 푹 빠져 있다. 북경에서 제일 멋진 관광지라는 말에 우리의 기대는 한껏 부풀고. 식빵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빵차라고 부른다는 6인승 차에 몸을 실었다. 빵차는 동네에서 자체 운영하는데, 동네 입구에서부터는 일체의 차량운행 금지다. 거기부터는 30여분 걸어가거나 그 차를 타야만 하도록 정해 두어서 그 곳 사람들에게 일거리와 수입을 제공케 한단다. 입구에 다다르니 ‘용경협 강택민’이라는 세로로 새겨진 붉은 글씨가 산 위를 수놓고 있다. 강택민이 다녀가고 너무 멋진 경치라고 칭송하였다 하여 방명록의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용경협 곳곳에 새겨 두었다. 과연 설명대로 입구에 용 모양의 거창한 것이 걸려 있는 게 잔뜩 기대감에 부풀게 하였다. 용 모양 속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댐 위에 담겨진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곳은 70m, 얕은 곳도 20m 깊이나 된다고 한다. 유람코스는 7km 정도. 산 위로 케이블카도 운행하고, 공중 곡예도 보여 주고, 번지점프대도 보이는 등 볼거리가 제법 되었으나 실 경치는 그리 감탄할만한 정도가 되지는 못하였다. 가이드가 너무 자랑한 탓일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아마도 북경에서는 그만한 산수를 찾기 어려운 탓에서 일 테지. 협곡을 막아 관광지로 개발한 중국인들의 상술이 놀랍긴 하였다.
북경에는 인공 호수가 참으로 많다. 그 옛날부터 황하강물을 끌어들여 운하를 만들었고, 인공호수도 많이 만들었다. 인해전술을 이런 일에도 썼나 보다.
저녁은 사천요리로 해결했는데, 사천요리는 맵고 강한 향기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나. 요리 종류로는 탕수육, 죽순불고기, 고기볶음, 오이, 양배추볶음, 땅콩, 양파볶음, 밥, 김치 등. 다 입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때마다 배불리 먹어서인지 허리둘레가 두둑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뺄려면 고생 꽤나 하겠다. ㅎ~
식사 후 밤 10시까지 열린다는 왕부정거리의 야시장 풍경을 보러 거리로 나갔다. 王府는 왕의 일가 친척들이 살던 곳이란 뜻이고, 王府井이란 말은 그 거리에 우물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중국에선 땅의 책상, 하늘의 비행기, 바다의 잠수함 빼고는 다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거리의 야시장엔 다양한 먹거리가 있었는데 열거하자면 전갈, 지네, 개구리 뒷다리, 해마, 왕번데기, 귀뚜라미, 과일꼬치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일행 중 선애씨가 제일 용감하여 전갈, 지네, 개구리, 해마 등 모든 요리에 도전하고……. 난 도저히 못 먹겠던데……. 개구리 살의 그 흐물거리는 느낌이란?
북경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아쉬움을 달래려 스차하이(십찰해, 什刹海)로 방향을 틀었다. 스차하이는 원나라 시기에 판 호수라고 한다. 후퉁거리 인력거 체험으로 스차하이를 한 바퀴 돌았다. 후퉁은 작은 골목이란 뜻, 거리마다 웃옷을 훌렁 벗은 남노인네들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인력거에는 두 사람씩 탔는데, 인력거꾼의 체력이 참 많이 소모될 것 같았다. 땀을 흘리며 한 바퀴 도는 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본격적인 스차하이 뱃놀이, 맥주 한 캔씩 준비하여 배에 몸을 실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일행은 두 배에 나누어 타고 음악원생들의 악기 연주를 안주 삼아 호수와 주변을 천천히 감상하였다. 호숫가에는 크고 작은 카페들이 즐비하였다. 일부의 사람들이 종이배를 띄우는 모습이 보였다. 종이배 안에는 작은 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호수가 빛의 물결로 반짝거려 더 아름다웠다.
마음이 편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이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 여행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확실한 매력 덩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