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일 = 2005년 7월 26일 > 6시 20분 기상! 어김없이 7시에 식사를 하고 8시 출발. 첫 코스는 頤和園, 100만평 규모의 정원은 청나라 황실 원림이며 행궁이었다.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다. 70%가 호수(곤명호)로 건륭제가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며 생일 선물로 건조하였다고 한다. 1860년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1888년 서태후(자희태후)가 재건 10년 만에 완공하고 ‘이화원’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화원 입구 인수문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운석이 떨어진 거라는... 황제의 자리보다도 더 높은 서태후의 자리... 서태후는 만주족의 딸로 귀인 신분으로 궁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동태후(1태후, 자안태후)가 자식이 없어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오르자 실세 태후로서의 권세를 누리기 시작하였다. 장랑은 길이 728m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래에 불편이 없도록 만든 회랑이다. 천장에는 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어 태후나 황제가 지나가면서 다른 그림을 보게 되므로 지겹지 않게 하였다 한다. 장랑 한가운데를 장식하던 글... 장랑의 천장에는 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배를 타기 위해 장랑의 중간 지점에서 빠져 나왔다. 용머리 모양의 유람선에 몸을 싣고 곤명호 한 가운데를 유유히 헤쳐 나갔다. 배에서 내려 섬 가장자리를 걸어 17공교를 건너니 이화원의 물을 다스리는 신인 소상(동우)이 버드나무 아래에 놀란 듯 호수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호수가 워낙 넓어 동우가 지키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태후의 부귀도 청나라의 영화도 뒤로 하고 이화원을 나왔다. 천단으로... 명나라 때엔 천지일월에 제사를 드리는 단을 동서남북에 배치하였는데, 그 중 성의 남쪽에 위치한 천단은 이름 그대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90만평의 대지에 남북으로 원구단, 황궁우, 기년전 등이 늘어서 있다. 3단으로 된 원구단에 올라 돌아보니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 사상에 따라 지은 네모진 외부 벽과 둥근 내부 벽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나라의 궁궐 등에 있는 연못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가?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바로 천원지방 사상에 따른 건조물이다. 제례에 쓰이는 지방의 양 윗부분을 자르는 것도 그 이유다. 황궁우는 역대 황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건물 동서 전각에는 북두칠성, 오행, 비, 바람 등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황궁우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회음벽은 내부가 비어 있어 담을 향해 소리 내면 반대쪽 담에 선 사람들에게 들린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황궁우를 나와 점점 올라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단계교를 건너면 기년전에 다다른다. 단계교 가운데가 神道다. 신도는 다른 길보다 높이가 높은데 신만이 지나갈 있으며 황제도 지나갈 수 없는 길이라고 한다. 기년전은 북경올림픽 관계로 보수를 하고 있었다. 기년전은 천단의 주요 건축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며 높이 38m의 삼단 원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중앙 4개의 용정주는 4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 12개의 기둥은 12시진(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절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9년 전 방문했을 때 천단 공원 화장실 사용료(당시 2각=한국돈 30원 정도)를 내고 이용했던 기억이 떠올라 가이드에게 요즘도 공중화장실 사용료가 있냐고 물어보니 요즘은 관광지에선 유료화장실이 하나도 없단다. 점심, 북경오리구이... 북경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요리가 ‘북경오리구이’ 아닌가? 북경의 전문 체육인들이 많이 애용한다는 ‘북경체육반점’에서 목탄(명13릉 근처에서 나는 배나무탄을 사용한다나) 구이한 고기를 먹었다. 원래 육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맛을 느낄 정도로만 먹었다. 워낙 기름기를 쫘악 뺀 탓에 고기는 담백하였다. 유리창거리... 유리창거리는 우리 나라의 인사동에 견주어지는 골동품 거리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곳으로 지금은 옛날의 명성을 잇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 곳 역시 북경올림픽 때문에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어 어지럽게 파헤쳐진 터라 관람이 조금 어려웠다. 천안문광장... 버스가 유리창거리를 지나 북경성의 남문들을 거쳐 천안문 광장에 닿았다. 광장의 중심에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모택동기념관, 동쪽에 박물관, 서쪽에 인민대회당, 북쪽에 천안문이 서 있다. 새로운 것은 광장 바닥의 네모진 쇠판 연결들, 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어서 많은 군중들이 모였을 때 급조 화장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지하도를 통해 천안문으로 가는 도중 임무 교대 중인 군인이 보였는데, 지하도 한쪽 구석에서 자기네끼리 몇 마디 주고받더니 교대하는 모양이었다. 공산국가이지만 의식이 많이 완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천안문은 북경성의 정문으로 우리에게 천안문사태라는 사건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장소다. 가운데 문 위에 모택동의 초상화가, 그 양쪽에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천안문 밖과 안에는 화표가 서 있었는데, 밖의 화표는 황제의 외출 시 행동을 주시하는 것이며 안의 화표는 궁에서의 황제의 행동을 주시한다고... 천안문의 모습.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만세'란 글이 붙어 있다. 자금성... 천안문, 단문을 지나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 이르러 티켓을 끊고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웬 문이 그리도 많은지 또 태화문이 버티고 있다. 계단을 올라 들어선 곳이 그 유명한 태화전, 영화 ‘마지막 황제-부의’에서 황제 즉위식을 연출해 보인 그 장소다. 자금성 내에서 제일 넓고 큰 궁전이다. 태화전은 금란전으로도 칭한다. 높이가 무려 35m나 된다. 새해인사, 만수삼대절, 황제등극,생신축하,출병정토 등 국가 대사를 이곳에서 치렀다나. 인간이 많았던 나라답게 규모도 엄청나다. 다음 전각이 중화전이다. 황제는 태화전의 옥좌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와서 준비를 하며, 대신들이나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도 이곳을 이용했다. 계절맞이 예식을 거행할 때나 사원에서 조상과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낭독하는 황제의 조서들도 모두 이곳에서 작성되었다. 1년에 한 번씩, 농업의식을 행할 때 필요한 농기구들과 새로운 종자들을 군주와 왕자들과 고위대신들에게 소개하는 일도 중화전에서 행해졌다. 외조 구역 끝 보화전은 명초기, 대신과 부마를 초대해 연회를 열었던 장소이다. 18세기 이후부터 이곳에서 고정적으로 전시가 시행되었고 청조에는 매년 설날 전날 몽고의 왕과 대신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보화전 북쪽으로 외조와 내정의 연결 구역, 부의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는 공간(마지막 황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위해 문턱을 깎았다는 곳을 다시 보면서 부귀영화가 한갓 꿈이었던 부의의 일생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정 구역 입구인 건청문을 지나니 명나라 황제들과 청나라의 초기 황제들이 거처했던 곳인 건천궁이 나타난다. 옹정제 때부터 이 궁전은 황제의 서재와 고관 및 사신들, 공국의 왕족들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나. 정월 초하루와 그 밖의 다른 기념일에는 이곳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고. 특히 옹정제는 이 궁전 홀에 특별한 기능을 부여했는데 다름 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왕자의 이름을 문서에 적은 뒤, 봉인한 상자 속에 넣어서 거실의 병풍 뒤에 감춰둔 것이다. 그리고는 상자 속 문서와 똑같은 문서를 한 장 더 만들어서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는 두 장의 문서를 대조해 이름을 확인한 뒤 새로운 천자의 이름을 선포했다. 청의 강희황제 이후, 황제가 태자를 선포하지 않고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서 작은 함에 보관 후 잘 봉하여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적혀진 편액 뒤에 보관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에 이것을 열어 계승자를 선포하였다. 교태전은 황후의 생일 때 경축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건륭황제는 황권의 상징인 25개의 옥새를 여기에 보관하였으며 동시에 자명종과 물시계 등을 보관하였다. 청대에 황후는 잠농에 제를 지내기전 이곳에서 준비 현황을 검사하였다고 한다. 곤녕궁은 명조시기 황후의 거주지였으며 중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청조에는 제신의 장소로 바뀌었다. 매년 정월 10일 신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신의 장소는 서쪽 방이었다. 청대 황제의 결혼시, 먼저 곤녕궁의 동난각에서 3일을 머문 후에 양심전으로 옮겼다. 그러나 실제로 이 궁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였다. 청의 강희(康熙), 동치(同治)와 광서(光緖)황제만이 이곳에서 결혼하였으며 그 외는 모두 결혼 후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내정 구역을 벗어나니 어화원이 나타났다. 고궁의 외조와 내정엔 자객의 침입 방지를 위해 바닥에도 벽돌을 여러 겹 깔았고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지만 이곳은 기암괴석과 고목으로 장식하여 황제와 후비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화원을 거쳐 신무문으로 나오니 해자가 둘러싼 고궁의 모습이 드러난다. 신무문 가운데에 ‘고궁박물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어서 이곳이 박물관임을 깨닫게 하지만 실제의 내부 유물들은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두 개의 중국으로 갈라질 때에 장개석이 유물들을 몽땅 싣고 대만으로 갔기 때문이다. 저녁엔 그 동안의 피로도 풀 겸 발마사지를 받기로 하였다. 20대 초중반의 남녀 마사지사가 일행 앞에 나타났다. 순전히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서 하는 마사지였는데, 한국어 몇 마디 익혀서 손님 환심을 사려는 태도에 우스워서 낄낄댔답니다. 요즘 관광객들 울궈먹으려고 음료수 사 먹으라 그러질 않나 각질제거 받으라 그러질 않나 손님을 무조건 돈으로 보더라구요. 말 시키느라 중국어 숫자도 가르쳐 주더군요. 일 一 yi [이―] 이 二 er [얼↘] 삼 三 san [산―] 사 四 si [쓰↘] 오 五 wu [우↘↗] 육 六 liu [리우↘] 칠 七 qi [치―] 팔 八 ba [바―] 구 九 jiu [지↘우↗] 십 十 shi [스↗] 숙소에 돌아오니 수완과 성질이 보통 넘는 현지 가이드가 상인 한 분 소개할 테니 한 번 보기나 하라고 하더군요. 결국 일행 분들 죽통술 사고야 말았죠. 마지막 날 저녁이라 일행은 제일 큰 방에 모여서 맥주파티 겸 여행 마무리 시간을 가졌답니다. 모두들 며칠 더 연장하다는 얘기가 오가고(단체 비자 받았는데 안 되는 거 알면서) 아쉬움에 한숨마저 쉬고. 못하는 술이지만 분위기에 동참하기 위해 반 캔쯤 마셨나? 혼자 다 마신 듯 얼굴 벌개져서 창피창피. 자기 전에는 더위에 지친 얼굴의 열기 식히려고 팩을 붙였는데, 룸메이트의 얼굴이 어찌나 우습던지(해골바가지 같은 모습이어서) 너무 웃어서 결국 팩을 뗐다가 한참 마음을 가라앉힌 후 붙였답니다. 내일은 돌아가야 하는데 아쉬워서 어쩌지? |
'방랑, 그 흔적들-세계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서안 대자은사와 대안탑(2011.01.04.화) (0) | 2011.01.09 |
---|---|
중국 서안 실크로드 시작점(2011.01.04.화) (0) | 2011.01.09 |
중국 서안 아방궁 유적지(2011.01.04.화) (0) | 2011.01.09 |
2005.07.27 북경 내몽고 7 (북경 부국해저세계) (0) | 2008.03.31 |
2005.07.25 북경 내몽고 5 (만리장성 외) (0) | 2008.03.31 |
2005.07.24 북경 내몽고 4 (내몽고 호화호특 대소사 외) (0) | 2008.03.31 |
2005.07.23 북경 내몽고 3 (향사만 사막 외) (0) | 2008.03.31 |
2005.07.22 북경 내몽고 2 (내몽고 시라무런초원) (0) | 2008.03.31 |